처음 남편을 봤을 때, 사람보다 직업이 먼저 보였다. 외교관. 뭔가 쉽게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은 단어였다. 원리와 원칙으로 살 것 같은 사람,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과 말투까지 딱 그 이미지였다.
잦은 해외 출장이 필요한 그와, 승무원인 나는 생각보다 자주 마주쳤다. 나는 조금 더 웃어주었을 뿐이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웃음으로 답하지 않았었다. 늘 같은 표정, 같은 어조. 그래서 우린 그저 자주 스치는 승무원과 손님일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 밖의 일은 정말 우연처럼 찾아왔다.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비행, 착륙을 앞둔 순간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너무도 무덤덤해서, 오히려 그 말이 더 또렷이 남았다.
“한국 도착해서 선약 없으면, 저랑 밥 한 끼 하시죠. 저 일부러 마지막 비행기 탔습니다.”
현실감이 없었다. 일부러 내 퇴근 시간에 맞춰 비행기를 골랐다는 말도, 그 얼굴로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도. 그렇게 어안이 벙벙한 채로 마주 앉은 식사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업무 밖의 그를 보았다.
생각보다 섬세했고,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태도는 부드러웠다. 그 후로 몇 번의 만남이 더 이어졌고, 예상보다 솔직하고 적극적인 그의 방식에 나는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우리의 손에는 웨딩반지가 끼워졌다.
서로 직업상 깊은 연애는 어려웠다. 기간은 길었지만 만남의 횟수는 적은, 상온 같은 연애 끝에 결혼했기에 나는 남편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혼하고, 함께 살아보니 그제야 알게 됐다. 말수도 적고 표정 변화도 없어 차갑게 보이던 이 남자.
스킨십 중독이었다.
요란하지도, 티를 내지도 않는다. 그냥 늘 옆에 있다. 소파에 앉아 있으면 어느새 같은 공간에 있고, 방에 들어가면 조용히 따라 들어와 있다. “언제 왔어?” 하고 물으면 늘 같은 대답.
“아까.”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얼굴로. 잘 때도 마찬가지다. 손을 잡거나, 팔을 두르거나, 어딘가 닿아 있지 않으면 잠들지 못한다. 먼저 잠들어도, 눈을 뜨면 항상 숨결 하나쯤은 닿아 있다. 누가 보면 애착 인형인 줄 알겠다.
기분이 상했거나 조금 피곤한 날엔 더하다. 말 대신 먼저 안는다. 이유도 설명도 없이. 이제는 그게 남편의 방식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출장 소식을 들었을 때도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멀어져도 변하지 않을 사람이 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짐을 싸던 날이었다.
거실에 캐리어를 펼쳐 둔 그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문득 그의 낮은 혼잣말이 들렸다.
“…어떻게 잘 하면.… 들어갈 수도 있겠는데.”
처음엔 짐이 너무 많나.. 싶어서 도와줄려다가. 이내 그 주어가 옷이 아닌 나란걸 알아차린 이후엔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한참을 캐리어 앞에 서 있다가 안되겠는지 조용히 닫더라.
난 그게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미 한참 전에 잠들어야 할 시간, 늘 그렇듯 끌어안고 자야 할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찾아보니 이 사람, 내 화장대 앞에서 몰래 향수를 챙기고 있더라. 며칠 전부터 내 물건이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범인이 바로 여기 있었다.
아주 날 캐리어에 나를 넣어 갈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결국 입을 꾹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더니, 이렇게 조용히 내 향수를 훔치고 있을 줄이야.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래. 이 무뚝뚝한 사람의, 이렇게나 사람다운 순간이 좋아서 내가 결혼한 거니까.
근데 여보… 뭘 가져갈 거면 말 좀 하고 가져가. 무슨… 도둑고양이도 아니고…
출장 일정이 확정됐을 때, 나는 별다른 동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 달. 길긴 했지만 불가능한 일정은 아니었다. 일은 늘 하던 대로 하면 된다. 회의, 보고, 협상. 익숙한 패턴이었다.
문제는 일이 아니었다. 아내가 없는 시간이었다. 결혼 후 처음 겪는 긴 출장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나는 잠시 멈춰 섰다. 혼자 있는 집, 소리 없는 밤. 그 상상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분리불안 같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렇게 말할 성격은 아니었다. 아내에게 매달리거나, 보고 싶다고 입 밖으로 꺼내거나, 애교를 부리는 건 내 삶의 목록 어디에도 없는 행동이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럴 예정도 없었다.
다만 아내 없는 시간을 떠올리자 생각보다 숨이 막혔다. 짐을 싸면서도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셔츠를 개고, 서류를 정리하면서도 자꾸 시선이 다른 데로 갔다. 거실 한쪽에 놓인 캐리어가 유난히 커 보였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안을 한 번 더 바라봤다.
중얼 잘 하면… 들어갈 수도 있겠는데.
순간 스스로에게 놀랐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아내를 캐리어에 넣고 간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는 스스로가 우스워 고개를 저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애초에 해서는 안 될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지퍼를 닫았다.
그런데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밤이 깊어 아내가 잠든 걸 확인한 뒤, 발소리를 죽이고 화장대 앞에 섰다. 목적은 단순했다. 향수 하나. 아내가 늘 쓰는 그 향이면 충분했다.
문제는 전부 비슷하게 생겼다는 거였다. 병도, 색도, 크기도.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괜히 하나를 들었다 내려놓고, 다시 다른 걸 집어 들었다. 오래 고민할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흘렀다.
뭐 이리, 비슷하게 생겼어…
그때였다. 등 뒤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몸이 먼저 굳었다. 손은 향수 위에 멈춘 채, 숨조차 잠시 멎은 느낌이었다. 돌아보지 못한 채 몇 초를 그렇게 서 있었다.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천천히 돌아섰을 때, 아내는 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변명할 말을 찾았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결국 체념한 것처럼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널 넣어갈 순 없어서.
잠깐 멈췄다가,
향수라도 챙기려고.
말을 끝내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변명도 꾸밈도 없는 말이었다. 결국 아내가 웃었고, 그걸 보는 순간 더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말 대신 다가가 팔을 벌렸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출시일 2026.01.26 / 수정일 2026.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