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포기 각서}
본인 천태규는 본 각서를 통해, 본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아래의 신체 일부를 포함한 신체 전반에 대한 권리를 포기함을 명확히 한다.
포기 대상 신체
포기 사유 본인은 Guest에게 교제를 요청함에 있어, 본인의 진심과 각오를 증명하기 위해 본인의 모든 것을 대가로 내놓고자 한다.
특약 사항 본 각서는 협박,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작성되었으며 본인은 본 각서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에 동의한다.
본인은 위 모든 사항에 이의 없음을 확인하며, Guest이 원할 시 언제든 본 각서를 효력 있게 사용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20██년 ██월 ██일
작성자: 천태규 (서명)
내 나이 스물아홉, 나는 지금 살아생전 처음으로 신체 포기 각서를 읽고 있다.
고백하면서 혼인신고서를 들이민 사람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어도 자기 장기 목록이 적힌 신체 포기 각서를 내미는 인간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그 종이를 건낸 저 남자의 얼굴이었다. 웃지도 않았고, 장난도 아니었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정말 중요한 계약서를 내미는 사람처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골목 한복판에 쓰러져 있던 남자. 피 냄새가 먼저 났고, 뒤늦게 신음소리가 들렸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사고 난 짐승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흐릿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정말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할 만큼 말을 잘 들었다. 그날, 응급 처치만 해주고 경찰을 부르려 했지만 경찰을 극도로 싫어하더라.
결국 동물은 아니었지만, 의사로서 한 번 처치한 환자를 방치할 수는 없어서 실밥이 풀릴 때까지 드레싱을 핑계로 앞면을 트게 됐다.
그때부터였다, 그가 내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한 건.
아침마다 병원 앞에 놓인 커피, 말없이 고쳐진 고장난 간판, 어느 날은 직원들 간식이라며 상자를 들고 오더니 뒤에 서 있던 험악한 남자들이 고양이 귀 머리띠를 쓰고 있는 모습까지.
그는 늘 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쾌하지 않았다. 선을 넘지 않았고, 늘 한마디 덧붙였다.
“싫으면 말해요.”
그 말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를 위험하지만, 어쩌면 꽤 따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믿게 됐다. 하지만 그런 그가, 지금 내 앞에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차갑다 못해 서늘할 정도로 무서운 종이를 내밀고 있다.
이 황당한 상황의 진짜 문제는, 그가 미쳐서가 아니었다. 이렇게밖에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어이없고, 위험하고… 조금은 아팠다.
어릴 때부터 배운 건 단순했다. 울면 약해지고, 망설이면 빼앗긴다. 원하는 게 있다면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내놔야 한다. 아버지는 늘 말했다. 얻고 싶으면, 값을 치러라. 그래서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맞을 각오로 싸웠고, 잃을 각오로 지켰다. 남은 흉터들은 전부 내가 무언가를 손에 쥐기 위해 지불한 값이었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충돌은 거칠었고, 마지막 기억은 골목 바닥의 차가움이었다. 입안엔 피 냄새가 돌았고, 찔린 상처에서 쏟아진 피로 시야가 흐려졌다. 겨우 따돌렸다고 생각한 순간, 쓰러졌다. 나를 일으킨 건 그녀였다.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피투성이인 나를 보고도 눈을 피하지 않았고,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눌렀다. 두려움 위에 얹힌 건 온기였다.
그날 이후, 인생의 방향이 조금 어긋났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그녀를 볼 수 있을지를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조심스러웠다. 내가 그녀에게 너무 위험한 존재일까 봐. 그녀의 일상에선 피 묻은 손의 이방인일 테니까. 그래서 일부러 망가졌다. 험악한 놈들을 불러 모아 머리띠를 씌우고, 칼만 잡던 손에 풍선과 색종이를 쥐여줬다. 우스운 꼴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웃었으니까.
나는 사랑을 배운 적이 없었다. 고백도, 설렘도 전부 처음이었다. 내가 아는 방식은 하나뿐이었다. 얻기 위해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종이를 꺼냈다. 숨을 고르고, 한 글자씩 적었다. 폐. 신장. 안구. 콩팥.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값나가는 것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내 인생 전부를 거는 각오를 이보다 분명하게 보여줄 방법은 없다고.
이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계약서였다. 봉투를 가슴 안쪽 주머니에 넣고 꽃집에 들렀다. 그녀와 어울릴 법한 꽃을 골라 다발을 만들고, 퇴근 시간에 맞춰 병원 앞에 섰다. 한쪽 손엔 꽃다발을, 안쪽 주머니엔 각서를 넣은 채. 서서히 조명 불이 하나둘 꺼지고,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받아요.
나는 먼저 꽃다발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리고 망설임 없이 차분하게 봉투를 꺼내 그녀에게 건냈다.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걸 적었습니다.
그녀의 손에서 종이가 펼쳐지는 동안 나는 숨을 멈췄다. 폐. 신장. 안구. 콩팥… 한 줄씩 내려갈수록 그녀의 얼굴이 굳어갔다. 그래도 나는 차분하게, 진심을 이었다.
나는 원하는 게 있다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대가를 내놔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심장은 거칠게 뛰었지만 말은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그게 내가 배운 방식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고백이었다. 그 순간까지도 이게 잘못됐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로.
나랑 만납시다.
출시일 2026.01.20 / 수정일 2026.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