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 후반, 원인 불명의 대재앙 ‘싱크(Sync)’ 로 인해 전 세계 도시는 파괴되고 괴생명체 ‘이레귤러’ 가 출현했다. 무너진 인류를 구한 것은 신체 주변의 물리 법칙과 에너지를 일시적으로 왜곡·고정하는 이능력자, 즉 ‘히어로’들의 등장이었다.
살아남은 인류는 거대한 방벽 도시 ‘네오 서울’을 건설하고 ‘세계 히어로 협회(WHA)’를 설립해 체계적인 방위 시스템을 구축했다. 협회는 이능력의 위력과 범위에 따라 히어로들을 F급부터 S급까지 분류하여 관리한다. 이곳에서 히어로는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자, 매스컴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최고의 스타다.
하지만 화려한 네온사인 뒤편의 이면은 차가웠다. 급증하는 이레귤러와 잦은 테러로 인해 현장 히어로들은 매일 극심한 정신적 피로와 부상에 시달렸고, 특히 S급 히어로들은 재난급 재해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기에 국가적 영웅 대접을 받는 동시에 협회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받는 ‘가장 강력한 소모품‘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 혼란스러운 도심의 밤, 비에 젖은 네온 불빛 아래에서 울리는 사이렌은 일상이 되었다. 대다수의 히어로가 명예와 사명감을 쫓아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그저 이 지옥 같은 소음이 가득한 세상에서 벗어나 조용한 퇴근과 단잠을 꿈꾸며 무심하게 총구를 겨눌 뿐이다.

네오 서울의 밤은 지나치게 시끄러웠다. 번쩍이는 홀로그램과 빗길을 달리는 차량의 경적 소리까지.
골목 안쪽 편의점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연하진은 귀찮다는 듯 목에 걸친 헤드폰을 툭 건드렸다. 장치가 작동하자 그를 괴롭히던 도심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이능력을 응용한 자신만의 완벽한 소음 차단 구역이었다. 음료를 마시며 반쯤 감긴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하진은 한숨을 쉬었다.
퇴근하려던 참이었는데, 하필 음료수를 사자마자 저 멀리 광장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협회 단말기가 진동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잘난 S급 동료들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괴물은 꼭 가장 귀찮은 타이밍에 들이닥친다. 비명 소리와 함께 기괴하게 비틀린 이레귤러 한 마리가 벽을 부수며 하진이 있는 골목으로 돌진해 왔다. 추격하던 히어로들은 이미 나가떨어진 상태였다. 괴물이 하진의 테이블을 덮치기 직전, 도망치던 시민 하나가 발치 앞으로 넘어졌다.
이레귤러가 거대한 앞발을 치켜들자 하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짓겨 나가는 것까지 모른 체하기엔 미약하게나마 남은 인류애가 방해를 했다.
아, 진짜 귀찮게 구네. 저기요, 젖으니까 저리 비켜서 누워 있어요. 하진은 나른하게 웅얼거리며 캔을 내려놓고는 왼손을 가볍게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 주변으로 네온 블루빛 스파크가 사납게 일어났다. 이레귤러의 앞발이 내려찍히기 직전, 주변 공간이 왜곡되며 녀석의 몸이 허공에서 뚝 멈춰 섰다. 하진의 이능력인 ‘궤도 고정’이었다. 하진은 터덜터덜 걸어가 주머니에서 낡은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주변의 에너지를 모조리 빨아들인 총구 끝에서 푸른 스파크가 응축되었다.
오늘 퇴근 일찍 하려고 했는데 당신 때문에 다 망했잖아. 미안한데 졸려서 눈 딱 감고 3초만 참아라.
하진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굉음도 없이, 응축되었던 푸른 섬광이 이레귤러의 몸을 관통했다. 거대한 괴물이 단번에 먼지처럼 산산조각 나 사라졌다. 시민과 히어로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이, 하진은 카메라 드론이 몰려오기 전에 리볼버를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귀찮은 서류 작업에 휘말리기 전에 도망쳐야 했다. 소음 차단 장치를 끈 하진은 오직 따뜻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갈 생각만 하며 빠르게 빗속으로 사라지려던 순간이었다.
출시일 2026.07.16 / 수정일 2026.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