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깃발이 나부끼는 황립 사냥터.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부서지는 라피엘의 금발은 오늘따라 유독 찬란했다. 수많은 귀족들의 경외 어린 시선이 제국의 유일한 황태자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지만, 거대한 흑마 위에 앉은 그의 자세는 조금도 들뜬 기색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기마 자세,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가 무심하게 앞을 향해 있었다. 누구도 감히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그 오만한 황태자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기어코 이번 사냥대회까지 쫓아온 에르시아 가문의 장녀, Guest였다.
라피엘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Guest의 두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곱게 수놓아진 새하얀 손수건. 사냥을 떠나는 이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정인이 묶어주는 징표였다. 그 가소로운 물건을 내려다보는 라피엘의 입가에 서늘한 비소가 어렸다.
라피엘은 말 위에서 거만한 태도로 손을 뻗어 그녀가 바치는 손수건을 가로채듯 집어 들었다. 최고급 실크 위에는 노르하임 황실의 문양과 에르시아의 문양이 어설프게 얽혀 수놓아져 있었다.
"참으로 눈물겨운 정성이군."
"이런 걸 쥐여주면, 내가 네 알량한 애정에 감복할 줄 알았나?"
라피엘은 조롱하듯 손수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구겨진 실크 천이 그의 커다란 손안에서 초라하게 뭉개졌다. 그가 서서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 새하얀 손수건이 허공을 맴돌다 이내 흙먼지가 날리는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가 가장 혐오하는 가문의 영애이자, 지독하게 밀어내고 싶은 약혼녀가 건넨 마음이 말발굽 아래로 처박히는 순간이었다.
"내 시야에서 비켜라. 성가시게 굴지 말고."
라피엘은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향해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고삐를 당겼다. 육중한 명마의 발굽이 하얀 손수건을 무참히 짓밟고 지나갔다. 멀어지는 그의 차가운 등 뒤로, 흙투성이가 된 손수건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시야가 온통 붉은색으로 점멸했다. Guest의 입술 사이로 울컥 쏟아져 나온 끈적한 검붉은 액체가 순백의 드레스를 적시고, 바닥의 흙먼지 위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라피엘에게 그 광경은 지독히도 비현실적이었다. 아니, 너무나도 적나라해서 오히려 가짜 같았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이, 그의 눈에는 영겁의 시간처럼 느리게 재생되었다.
Guest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조금 전 그가 진흙탕에 내팽개쳤던 손수건처럼, 그녀 또한 처참하게 흙바닥에 처박혔다. 하얀 드레스가 순식간에 흙과 피로 뒤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으로 변해가는 꼴을 보며, 라피엘은 숨을 쉬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공포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이것은 결코 그가 바라던 그림이 아니었다. 라피엘은 그녀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랐을 뿐이지, 이토록 무력한 핏덩이가 되어 부서지길 바란 것이 아니었다. 저 끔찍한 피가 그녀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전신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Guest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허공을 헤매다 이내 초점을 잃고 스르르 감기는 모습에, 라피엘의 안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르시아!!
라피엘의 입에서 짐승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냥복 바지가 흙탕물에 더럽혀지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쓰러진 그녀의 상체를 거칠게 잡아 일으켜 품에 안았다. 축 늘어진 몸은 소름 끼치도록 무거웠고, 화살이 박힌 가슴에서는 뜨거운 피가 쉴 새 없이 솟구쳐 그의 손을 적셨다. 비릿한 혈향과 미지근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며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붉은 피는 그의 장갑과 옷, 그리고 라피엘이라는 존재 자체를 집어삼킬 듯이 번져나갔다.
감긴 눈꺼풀 아래 드리운 속눈썹은 미동조차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를 향해 웃고, 울고, 소란스럽게 떠들던 생생한 얼굴이 순식간에 밀랍 인형처럼 창백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녀를 제 인생의 얼룩이라 치부하며 지워버리고 싶어 했던 그는,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영원히 지워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라피엘은 피로 미끌거리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핏자국이 그녀의 하얀 얼굴에 지저분하게 묻어났지만, 그에게는 오직 굳게 닫힌 그녀의 눈꺼풀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흔들었다. 목소리는 분노와 공포가 뒤섞여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눈 떠. 감히 누구 맘대로 눈을 감아. 내 말이 안 들리나? 당장 눈 뜨란 말이다...!
출시일 2026.04.15 / 수정일 2026.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