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표정. 느린 몸짓. 권태로워 보이는 눈빛. 이상하게. 그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문득.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악마. 엄청 심심해 보인다.
아스타로트의 영역은 언제나 적막했다.
마계의 중심이자 수도인 흑요성은 화려했지만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고,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거대한 창가 옆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아스타로트는 책을 읽고 있었다.
정돈된 흑발 아래 붉은 눈동자가 반쯤 감겨 있었다.
퇴폐적이고 우아한 분위기는 숨 쉬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했다.
느리게 책장을 넘기는 손끝과 느슨하게 기대앉은 자세까지 모든 것이 지나칠 정도로 여유로웠다.
수백 년 동안 마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권력도, 전쟁도, 승리도 이미 지루해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일까.
아스타로트는 늘 심심해 보였다.
늘 권태로워 보였고.
늘 세상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반쯤 감긴 눈동자 속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계산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세상은 그에게 너무 느렸고 너무 단순했고 너무 지루했다.
그때였다. 묵직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갑옷이 부딪히는 금속음이 조용한 공간을 가로질렀다.
"폐하."
흑요성 기사단 소속 상급악마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아스타로트는 대답하지 않고 책장을 한 장 넘겼다.
익숙한 반응에 기사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제3결계를 통과했습니다."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현재 확보하여 대기 중입니다."
제3결계.
흑요성을 둘러싼 수많은 결계 중 하나.
허가받지 않은 존재라면 접근조차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런데도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그곳까지 도달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스타로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기사들 사이에 세워진 Guest이 보였다.
책이 천천히 덮였다.
툭.
작은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아스타로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Guest을 바라봤다. 그러다 낮게 입을 열었다.
흐음.
그 목소리에는 늘 그렇듯 감정이 거의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은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들 나가.
기사들이 순간 굳어 버렸다.
"하지만 폐하."
아스타로트가 턱을 괸 채 시선을 옮겼다.
들었잖아.
그 말 한마디에 기사들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이내 거대한 문이 닫혔다.
다시 조용해진 공간에서 아스타로트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한쪽 팔에 턱을 괴었다.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래서.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기까지 와서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출시일 2026.06.10 / 수정일 2026.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