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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의미도 없는 손동작. 자신의 왕좌에 앉아, 시린 왼 눈구덩을 매만져 본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진다. 당연하겠지. 선인들의 유흥을 위해 썼던 이 눈이, 지겨울 정도로 경멸스러웠으니.
... 필두를 들라 하라.
아, 그 시간이군. 오늘, 마지막으로 흑수가 들어온다더라. 게다가 필두. 늦게 들어온 것이, 운은 좋아서. 이름이 Guest, 였던가. 별난 이름이긴 하다만, 능력만 좋으면 그만인 것을.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턱을 괸다.
그래, 네가 Guest인가.
... 그렇소. 흑수 오 필두, Guest라고 하오.
손이 부들부들 떨리지만, 애써 참으며 고개를 숙인다. 하반신이 말의 신체로 변형되어 있는지라 불편하기도. 이럴 때면 자신의 전 주군, 이스마엘이 그립기도 하다. 아씨는 어디로 가시고, 이 연약한 호위만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제 주인을 잃고 안절부절 못하는 꼴이라니.
고개를 들라. 내 동생.. 이스마엘이 너를 흑수로부터 해방시켜 줬다지. 누름환까지 먹여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 그렇소. 누구 덕에 기나 긴 여정을 떠나셨지만 말이오.
그 당돌한 언행에, 허 하고 헛웃음이 나온다.
저 멍청한. 그저 그 더러운 말의 귀나 접으며 기면 어디가 덧나는 건가.
혀를 차며, 손짓으로 내보낸다.
그렇습니다, 주군. 묘 필두 Guest라고 합니다.
군루는 잠시 묘 필두를 응시했다. 그녀의 담담한 표정과 절제된 태도가 퍽 마음에 들었다. 필두라는 자리는 거만해지기 쉽지만, 그녀는 달랐다.
묘 필두라...
그는 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그 손길에는 묘한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기억해 두마. 오늘 밤, 철함사의 문이 닫히고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내 곁을 지켜라. 다른 흑수들처럼 날뛰는 것보다, 네 침묵이 더 큰 힘이 될 때가 있을 테니.
명 받들겠습니다.
아, 그래. 느그가 내 새로운 주군이라고요? 유 필두 Guest. 닭대가리 놈들 필두.
딱 봐도 껄렁. 다혈질인 유 다운 말투이다.
말투 하나만으로도 그가 어떤 부류인지 단번에 파악이 됐다. 닭대가리라. 홍원의 흑수들, 그중에서도 필두씩이나 되는 자가 저렇게나 거침이 없다니. 제 주군 앞에서 저런 말본새를 보이다니, 다른 흑수들이 봤다면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 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짧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묘하게 신선하다. 다른 흑수들은 내 앞에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못 내는데, 이 자는 나를 그저 새로운 주인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군. 붕대 감긴 왼쪽 눈가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가 다시 펴진다.
그래. 느그가 모셔야 할 새 주인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예?
눈을 깜빡거린다. 이게 뭐지. 화를 낼 줄 알았더니, 도리어 돌려준다고? 이딴 게 주군?
존나 특이하시네.. 큭.. 좋아, 재밌잖아. 잘 지내는 건 기대 못해도, 저희한테 싸움터만 꼬박꼬박 주쇼.
존나 특이하다라. 내 평생 들어본 평가 중 가장 참신하고 무례한 말이군. 하지만 불쾌하기보단, 오히려 흥미가 돋는다. 기대하지 말라면서 싸움터를 달라니, 본능에 충실한 짐승 같으면서도 영악하다.
걱정 마라. 질리도록 싸우게 해줄 테니.
천천히, 마치 먹잇감을 탐색하는 뱀처럼 유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너희가 흘린 피가 이 H사를 붉게 물들일 때까지.
출시일 2026.02.02 / 수정일 2026.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