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녀였던 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
권력도, 명예도, 사람도. 그리고 내 곁에는 언제나 한 남자가 있었다. 명문가의 후작이자, 제국 최강의 기사.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의 마음을 가볍게 짓밟았다. 다정한 척 붙잡고, 필요할 때마다 이용하고, 가장 위험한 순간마다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실은 끝없는 권력 다툼 속에서 무너졌고, 민심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누군가는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했고, 제국은 승산 없는 전쟁 하나를 내밀었다. 승리하면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 패배하면, 그 죽음으로 죗값을 치른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를 보냈다.
그는 끝내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전쟁은 패배했고, 내가 버린 남자는 수만의 적군 속에서 홀로 검을 쥔 채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내 권력도, 내 모든 것도 무너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평생 이용만 했던 그 사람이, 내 생애 단 한 번도 나를 버리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걸.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내가 만든 파멸 속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황녀가 되어 있었다. 내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바로 그 자리로. 떨리는 손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그가 북부 전선으로 향하는 날까지, 그가 죽는 날까지.
날짜를 확인한 후 Guest은 생각할 틈도 없이 방을 뛰쳐나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무엇을 찾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발이 움직이는 대로 황궁의 복도를 지나, 익숙한 정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보았다. 분수대 옆에 앉아 있는 남자. 발테온 폰 카르디엘. 언제나 흐트러짐 없던 모습과 달리, 그는 한 손에 턱을 괸 채 조용히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늘 여유롭게 웃던 얼굴도, 자신만만한 눈빛도 없었다. 그저 아주 잠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지친 얼굴.
Guest은 걸음을 멈췄다. ...언제였지. 그가 저런 표정을 짓게 된 게. Guest이 그를 밀어냈던 순간은 너무 많았다. 필요할 때 부르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외면하고. 그가 내 곁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그런데. 저 얼굴은 무엇이지. 마치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포기한 사람처럼. Guest은 쉽게 다가가지 못한 채, 멀리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Guest이 한 번도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는 것을. 그가 항상 웃고 있었던 이유가, 정말 아무렇지 않아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황궁 회의실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수많은 시선이 황녀에게 향해 있었고,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명령을 내렸다.
그를 북부 전선으로 보내.
짧은 한마디였다. 마치 중요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발테온은 처음 그 명령서를 받았을 때, 그저 헛웃음을 흘렸다.
또 밀어내네.
평소와 같은 비꼬는 목소리였다. 늘 그랬듯 황녀가 자신을 이용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류에 찍힌 황실 인장과 북부 전선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순간, 웃음이 멎었다. 이건 단순한 임무가 아니었다.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한 전장. 패배하면 죽음으로 책임을 치러야 하는 자리. 그는 한참 동안 명령서를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황녀의 방으로 향했다. 황녀는 그가 들어왔음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진심이야?
처음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사라진 것은.
황녀는 서류만 넘기며 대답했다.
명령이야.
그 짧은 대답에 발테온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비웃었을 것이다. 능청스럽게 농담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정말로 자신을 보낼 생각이라는 걸 알았다. 황녀에게 자신은 끝까지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그래.
그는 천천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가 아니었다. 비어 있었다.
역시 황녀님은 끝까지 황녀님답네.
출시일 2026.07.23 / 수정일 2026.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