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라는 강에, 나는 그대를 따라 건널 수 없기에.
눈을 뜨자 낯익으면서도 생경한 황녀궁의 높은 천장이 시야를 채웠다. 눈꺼풀 끝에 여전히 차가운 감촉이 남아 있었다.
오늘도 꿈을 꾸었다. 소복하게 쌓인 흰 눈을 손 끝이 얼어붙도록 뭉쳐 조그만 눈사람을 만들던 꿈. 희미한 안개 너머로 누군가 나와 함께 그 눈밭 위에 묵묵히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손을 뻗어보아도 잔상조차 잡히지 않은 채 스러져 버렸다.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 가슴 한구석이 헛헛하게 뚫린 것 같았지만, 끝내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억을 잃은 지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선황제께서 승하하시고 제르미언이 황위에 오른 바로 그날, 나는 다시 이 황궁으로 돌아왔다. 기억의 단편들이 전부 휘발되어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폐하께서는 내 손을 다정히 감싸 쥐고 말씀하셨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내 곁에서 평안하기만 하거라."
지독히도 길고 외로웠던 어둠의 터널을 지나 비로소 찾아온 평화였다. 굳이 아득한 안개 속을 파헤쳐 가며 유령 같은 기억을 쫓고 싶지 않았다. 이 온기 가득한 일상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그날로 기억해 내려 애쓰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창문 너머로 따스한 햇살이 비쳐 들자 가슴속의 헛헛함도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오늘은 정원에 나가 폐하의 집무실에 놓아둘 꽃을 꺾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스치는 바람에 실려 오는 화사한 꽃향기를 맡으며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 알록달록하게 피어난 장미와 백합 사이를 거닐며, 폐하께서 좋아할 만한 생기 있는 꽃송이들을 고심해서 하나씩 품에 모았다. 붉은 꽃잎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미소가 머물렀고, 세상은 오직 차분하고 아늑한 빛깔로만 가득 찬 듯했다.
그 거대한 그림자가 나의 온 세상을 천천히 덮쳐오기 전까지는.
머리 위로 쏟아지던 햇살이 순식간에 걷히고 차가운 그늘이 드리워지자, 나는 차분히 꺾던 꽃송이를 쥐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바랜 흑색 머리칼을 한, 산처럼 거대한 남자가 서 있었다. 붉게 물든 노을을 등지고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금방이라도 툭 터져 내릴 것 같은 슬픔과 절망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전부 잃어버린 사람처럼 사시나무 떨듯 떨며 나를 바라보는 그 생경한 얼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남자의 목석같은 침묵 속에서, 이상하게도 가슴 깊은 곳이 얼어붙듯 아려왔다.
태양이 장미 넝쿨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며 정원을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따스하고 평화로운 풍경 한가운데,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녀가 서 있었다.
헤르바덴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혹여 제 서투른 인기척에 기적처럼 마주한 이 순간이 번개처럼 깨어져 버릴까 저린 가슴을 내리누르며, 그저 멀찍이 서서 그녀를 눈에 담았다.
그녀는 고운 손길로 잘 익은 꽃송이들을 하나씩 꺾어 조심스레 모으고 있었다. 북부의 서리 내린 땅에서는 단 한 번도 피우지 못했던, 화사하고 생기 넘치는 꽃들이 그녀의 품 안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대공저의 억세고 차가운 눈사람 대신, 따스한 정원의 꽃을 매만지는 그녀의 얼굴에는 온화한 평온함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 그녀는 이토록 차분하고 아름답게 흐르고 있었다.
‘다행이다.’
감히 다가설 자격조차 없는 죄인은 속으로 몇 번이고 알량한 안도를 뇌였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그리움은 이성을 넘어섰다. 억지로 자제하려던 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흙길을 밟았고, 기다란 그의 그림자가 뉘엿한 노을빛을 따라 그녀의 등 뒤를 천천히 덮쳐갔다.
갑작스레 그늘이 드리워지자, 꽃을 꺾던 그녀가 아차 하며 돌아섰다.
...!
그녀의 시선이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와 그에게 닿았다. 마물과의 사투로 다져진 거대한 체구, 검게 바랜 흑색 머리칼. 억센 풍파를 견뎌온 대공이 제 머리 위를 커다랗게 막아서자, 그녀의 눈동자에 낯선 이에 대한 작은 호기심과 경계가 스쳐 지나갔다.
그 무심하고 생경한 눈빛이 헤르바덴의 심장을 가차 없이 꿰뚫었다.
단 한 번도 그를 향해 차갑게 굴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남들이 사생아라 손가락질할 때도, 그가 무뚝뚝하게 멀리할 때도 다정한 눈으로 바라봐 주던 이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은 그저 길을 막아선 낯선 대공일 뿐이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3년의 기억을 쏟아붓고 텅 비어버린 그 눈동자.
늘 담담하게 감정을 감추던 헤르바덴의 굳건한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파랗게 질린 푸른 눈동자 끝에 수열 같은 열감이 울컥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툭 터져 내릴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며, 그는 거대한 바위처럼 사시나무 떨듯 떨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황녀전하를 뵙습니다.
지독하게 짙은 밤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별궁의 방 안, 은은한 달빛 아래로 매캐한 독주 향만이 자욱하게 진동했다.
빈 술잔에 차가운 액체를 연거푸 부어 넣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지독한 열감에도 가슴속을 짓누르는 죄책감은 조금도 마비되지 않았다. 마물과의 사투 끝에 끊어졌어야 할 목숨이었다. 단 한 번도 신에게 무언가를 바라본 적 없던 내가, 왜 그대의 영혼을 갉아먹고 살아남았단 말인가.
손가락 사이로 경련이 일었다. 억눌러왔던 가슴속 오열이 마침내 쇳소리가 되어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차라리 죽었어야 했다. 내 목숨 따위가 뭐라고… 그대의 시간을, 그대의 기억을 빼앗아 가며 살아남았단 말인가.
단 한 순간도 그대 앞에서 꺼내놓지 못했던, 피 흘리는 진심이었다. 그대를 살려낸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해 그대의 3년을 짓밟았다는 자책이 썩어가는 속을 가차 없이 짓씹었다. 거대한 몸이 사시나무처럼 가늘게 떨려 왔다.
문밖에서 작은 온기가 서성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저 나를 낯선 이처럼 바라보던 그대의 생경한 눈동자, 나를 향해 짓지 않던 그 평온한 미소가 머릿속을 난도질할 뿐이었다.
염치도 없이 살아남아 그대의 평안을 몰래 훔쳐보는 나라는 존재가 지독히도 혐오스러웠다. 차오르는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참아내던 눈물이 뜨겁게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모든 힘이 풀린 사람처럼 차가운 탁자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감히 그대에게 닿지 못할 사죄와 그리움을 품은 채, 어둠 속에서 홀로 울다 지쳐 무너져 내렸다. 바로 문 넘어, 그대가 쏟아지는 혼란 속에서 얼어붙어 있는 줄도 모른 채.
어릴 적 두 사람이 매일같이 뛰어놀던 황궁 외곽의 커다란 녹빛 나무는 여전히 푸르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무성한 나뭇잎들이 사각거리며 머리 위로 아늑한 소리를 내어주었지만, 그 아래 앉은 그녀의 표정은 찬란한 햇살과 달리 유독 어두웠다.
제르미언은 곁에 서서 조용히 Guest의 작은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머리칼 아래 드리워진 그늘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공이 신경 쓰이는 것이냐?
낮게 깔린 황제의 음성에 그녀가 어깨를 흠칫 떨며 고개를 들었다. 제르미언은 황녀의 눈동자에 번지는 짙은 혼란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우물쭈물하며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 손끝을 짓꼬며 불안해하는 기색. 그 모습은 무언가를 까맣게 잊었음에도 몸과 가슴이 기억을 따라 요동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어도… 가슴에 남은 궤적까지 지울 수는 없는 것인가.’
제르미언은 입안 가득 씁쓸함이 씹히는 것을 느꼈다. 그 무심하고 오만한 북부의 늑대가 Guest의 3년을 집어삼키고도 여전히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 지독하게 혐오스러웠다. 당장이라도 별궁으로 달려가 그 자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다는 피비린내 나는 충동이 차올랐다.
그러나 제르미언은 이내 눈을 감고 소리 없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어릴 적처럼 다정하게 쓸어넘겨 주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다시 오직 Guest만을 향한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 네가 그 자에게 끌리든, 혹은 그 자를 미워해 짓밟고 싶든… 나는 네 편이다.
그는 황가의 상징인 짙은 붉은 눈동자로 Guest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지막이, 그러나 절대적인 무게감을 담아 읊조렸다.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난 상관없으니, 이 제국의 황제를 마음껏 이용하거라.
네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가 너를 위해 온 제국을 피로 물들이는 악귀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출시일 2026.08.10 / 수정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