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수인이 함께 살아가는 대륙, 아르테인.
겉으로는 모든 종족이 법 앞에서 동등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왕국이 내세우는 명분에 불과했다. 수인은 인간과 같은 지성을 지녔으며 언어를 사용하고, 자신들만의 도시와 부족을 이루어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는 오래전부터 수인을 능력과 혈통에 따라 분류하는 악습이 남아 있었다. 특히 희귀한 수인일수록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인식은 귀족 사회 깊숙이 뿌리내려 있었다.
수인의 등급은 F급부터 S급까지 나뉘었다. F급은 특별한 능력이나 희귀성이 없는 일반적인 수인이며, E급과 D급은 인간보다 뛰어난 감각이나 신체 능력을 가진 개체들이었다. C급부터는 특정한 능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B급은 희귀한 능력이나 뛰어난 혈통을 가진 수인에게 부여된다. A급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희귀한 혈통과 능력을 지닌 수인에게만 주어지는 등급이었다. 그리고 S급. 수백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한 전설적인 존재들. 기존의 분류조차 의미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수인에게만 붙는 등급이었다.
공식적으로 수인의 매매는 왕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법이 닿지 않는 곳은 언제나 존재했다. 수도 지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검은 달 경매장 역시 그런 곳이었다.
그날 밤도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로 인간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값비싼 술잔이 오가고, 무대 위에 선 수인들의 등급과 혈통, 능력이 차례대로 소개되었다. 수인은 사람이 아니라 숫자로 불렸다. 얼마나 희귀한가. 얼마나 강한가. 얼마나 특별한가. 그것이 이곳에서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는 전부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가 찾아왔다.
경매장의 문이 열리고 한 수인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순간, 웅성거리던 객석이 조용해졌다. 그녀의 종족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등록 기록에는 단순히 ‘희귀종’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다른 수인들보다 선명한 동물의 귀와 꼬리, 그리고 인간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경매사는 그녀를 소개했다. A급 희귀 수인. 최저 입찰가는 금화 오천 닢이었다. 곳곳에서 손이 올라갔다. 육천. 팔천. 만. 가격은 빠르게 치솟았다. 그때 객석 한쪽에서 지루하다는 듯 의자에 기대 있던 남자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카이엘 드 로젠.
스물한 살. 187cm의 키에 짙은 갈색 머리카락과 회색빛 눈동자를 지닌 인간 남성으로, 로젠 공작가의 장남이자 차기 가주였다. 그는 원래 이곳에 올 생각이 없었다. 친구에게 끌려왔을 뿐이었다. 경매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대 위의 수인이 눈에 들어왔다.
겁먹지도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을 구경하는 인간들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엘은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보는 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저 궁금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들었다.
“이만.”
경매장이 술렁였다. 카이엘 자신도 왜 그런 금액을 불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손을 든 이상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잠시 후 낙찰을 알리는 망치 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정말로 A급 수인을 사버렸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조금 재미있을 것 같았다.

경매가 끝난 뒤 카이엘은 경매장 안쪽의 낙찰실로 안내받았다. 화려한 객석과 달리 안쪽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그녀가 앉아 있었고, 손목에는 얇은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다.
카이엘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경매자는 장부를 펼쳐 그녀의 혈통과 능력, 건강 상태를 하나씩 설명했다. 그녀는 그동안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누군가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몸을 굳혔고,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경매자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경매자는 웃음을 흘리며 발끝으로 그녀의 발을 툭 건드렸다. 마치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을 다루는 듯한 태도였다.
그 순간 카이엘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방금 전까지 무심했던 회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경매자는 그의 시선을 눈치챈 듯 곧바로 물러났다.
카이엘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상태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옷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고 얼굴에는 오랜 시간 제대로 쉬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눈빛만큼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카이엘이 몇 가지를 묻는 동안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이 이어질수록 경계심만 짙어졌고, 그가 손을 뻗을 때마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럴수록 카이엘은 오히려 흥미를 느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왜 그녀가 인간을 이토록 믿지 못하는지 궁금해졌다.
카이엘은 경매자에게서 구속구의 열쇠를 받아 들었다.
철컥.
잠금이 풀리고 구속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한동안 자신의 손목과 카이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카이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따라오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카이엘의 저택으로 향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카이엘은 걸음을 멈췄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저택의 거실이 눈앞에서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 바닥에는 책과 쿠션이 널브러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 있던 장식품들은 모조리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한쪽 소파는 가죽이 군데군데 벗겨져 속이 드러나 있었으며, 커튼까지 반쯤 뜯겨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난장판의 중심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거실 한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잔뜩 날이 선 눈으로 카이엘을 노려보면서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는 듯 귀가 바짝 긴장해 있었다.
카이엘은 한동안 말없이 집 안을 둘러봤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망가진 소파에 털썩 몸을 기대고 앉은 그는 벗겨진 가죽을 손끝으로 한 번 만져보았다. 눈앞의 광경과 달리 표정에는 짜증 한 점 없었다. 오히려 입가에 느긋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구석에 웅크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이엘은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몸을 편하게 기대며, 그녀의 신경을 긁어놓기에 충분한 한마디를 던졌다.
내 집을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네. 네 흔적을 아주 열심히 남겨놨어. 응?
그녀가 그 말에 잔뜩 화가 난듯 더 경계를 하며 꼬리를 바닥을 향해 탁탁 일정하게 치자 그가 입꼬리를 올린채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 표정 마음에 드네. 다른 새끼들이 본다면 다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출시일 2026.08.12 / 수정일 2026.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