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라진 세계에는 수많은 종족이 살아가고 있었다. 숲을 다스리는 엘프, 대지를 살아가는 수인, 광석과 불을 다루는 드워프, 자연의 마력을 품은 정령족. 그리고 그 모든 종족의 위에는 용족이 있었다. 용족조차 감히 같은 선상에 두지 못하는 존재가 있었다. 태초부터 존재해 온 고룡. 그중에서도 마지막 순혈 고룡이자 모든 종족을 다스리는 왕, 아르젠.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왕좌를 지켜온 그는 누구보다 강하고 냉정했으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런 아르젠의 곁에 어느 날 한 인간이 나타났다. 멸종했다고 알려진 종족의 마지막 생존자. 그녀는 마력도, 신분도, 왕에게 내세울 혈통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르젠은 그녀를 곁에 두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그 감정은 조금씩 달라졌다. 왕에게 처음으로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고,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았던 마음을 그녀에게 허락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궁 안에서 그녀에 관한 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속삭임이었던 말들이 수많은 입을 거치며 진실처럼 변했고, 마침내 그녀가 왕을 이용하기 위해 접근한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되었다. 뒤이어 나타난 증거들은 그 소문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르젠은 그녀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왕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의심할 권리마저 요구했다. 결국 그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한때 가장 가까이 두었던 여자를 자신의 왕궁에서 내쫓았다.
그날, 그녀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아르젠 역시 그녀가 품고 있던 비밀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궁을 떠난 뒤,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다. 왕궁의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는 동안 그녀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조용히 살아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리엘이라는 어린 여자아이가 함께 있었다. 리엘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어머니와 함께하는 평범한 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리엘에게서 설명할 수 없는 힘이 흘러나왔다. 인간에게는 존재할 수 없는 기운. 오래전부터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고룡의 힘이었다. 그 흔적은 결국 왕국에까지 닿았다. 아르젠은 자신과 닮은 낯선 힘의 존재를 감지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 앞에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손. 익숙한 눈동자. 어딘가 자신을 닮은 기척. 아르젠은 한동안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리고 리엘의 뒤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여자를 본 순간, 수년 동안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던 고룡왕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날도 그녀는 리엘을 품에 안은 채 왕궁 외곽의 정원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아직 혼자 걷지 못하는 어린 리엘은 그녀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작은 손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한참을 걷던 중,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물건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리엘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곧바로 물건을 주워 들기 위해 몸을 숙였다. 손에 물건을 쥐고 다시 돌아섰을 때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곁에 있던 리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급하게 주변을 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 안쪽에서 작은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리엘은 두 손과 무릎으로 바닥을 짚은 채, 낮은 울타리 아래를 지나 안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급히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리엘이 향한 곳은 평소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깊숙한 곳이었다. 정원의 끝에 자리한 거대한 별채. 왕궁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은밀한 곳. 그녀 역시 이 곳을 알지 못했다.
아르젠 드 라크시온의 별채였다. 리엘은 아무것도 모른 채 열린 문틈 사이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별채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그날도 아르젠은 왕궁의 별채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많은 종족의 소란과 끝없는 정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조용한 정적 속에서 책장을 넘기던 그의 귀에 문밖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을 스치는 듯한 미세한 소리였다.
아르젠은 책에서 시선을 떼었다. 곧이어 별채 안으로 작은 움직임이 들어왔다. 아직 제대로 걷지 못하는 어린 여자아이가 두 손과 무릎을 바닥에 짚은 채 천천히 기어오고 있었다. 아르젠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누구의 아이인지,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별채는 왕궁에서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이는 울지도 않았고, 자신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를 향해 느릿하게 기어오고 있었다. 아르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아이에게서 아주 미약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인간에게서 느낄 수 없는 기운이었다. 너무 희미해서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고룡의 혈통을 가진 그에게는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별채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르젠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곧 열린 문 너머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숨을 조금 가쁘게 몰아쉬며 걸음을 멈춘 그녀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아르젠의 머릿속에서 수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자신의 왕궁에서 내쫓았던 여자. 다시는 마주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 그녀가 지금 자신의 별채 앞에 서 있었다.
아르젠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서 바닥의 어린 여자아이에게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수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쉽게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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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시일 2026.08.08 / 수정일 2026.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