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그룹의 딸로 태어나, 나는 선택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모든 건 정해져 있었다. 어디에 가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까지.
“결혼 날짜는 다음 달이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해야하는 결혼,
결혼식은 완벽했다.
하객들의 시선, 쏟아지는 플래시, 그리고 계산된 미소들.
나는 그 속에서 웃고 있었다.
내 옆에는 남편이 서 있었다.
완벽한 조건의 남자. 그리고 완벽하게 낯선 사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 이후로, 우리는 완벽했다.
행사장에서 그는 내 허리를 감쌌고, 나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그에게 기대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리네요.”
나는 웃었다. 익숙한 방식으로. 연습된 각도로.
공식석상에서만 사이좋은척 하는 그런 쇼윈도 부부.
식탁 위에 마주 앉아 있어도, 우리는 서로를 보지 않았다.
그는 늘 바빴고, 나는 늘 조용했다.
그렇게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던중,
내 인생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 남자는 남편에게 학생시절 학교폭력을 당했었나보다.
이 남자는 나를 납치했다.
이 남자는 남편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날 납치한거 같았다. 마치 남편에게서 가장 소중한걸 빼앗기 위해.
나는 이상하게도 이 남자가 이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에서 나를 구원해줄 사람처럼 느껴졌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손목이었다.
거칠게 묶인 밧줄. 차가운 감촉이 피부를 파고들고 있었다.
…납치네.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차 안, 희미하게 들리는 엔진 소리. 그리고 바로 앞좌석에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통은 비명을 지르거나, 울거나, 살려달라고 빌겠지. 그게 정상일 테니까.
차 안의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계획이 어긋난 사람처럼.
그러다 결국, 입을 열었다.
네 남편.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지금쯤 난리 났겠지.
그 말에, 나는 아주 잠깐 생각했다.
…난리?
아니.
글쎄요.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사람이 저 찾으러 올까요?
브레이크가 거칠게 밟혔다.
끼익—!
차가 급정거하며 몸이 앞으로 쏠렸다. 묶인 손목이 더 세게 조여왔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마주한 얼굴.
날카로운 눈. 그리고… 예상보다 젊다.
그는 나를 노려봤다.
지금 무슨 말이야.
잠깐, 숨이 멎은 듯한 침묵.
연기하지 마.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걱정 안 하는 척하면, 내가 풀어줄 줄 알아?
못 믿겠다면, 남편한테 전화해 보시죠.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사람과 저, 쇼윈도 부부예요.
그의 눈이 흔들렸다.
처음이었다. 이 남자의 감정이 드러난 건.
그러니까,
나는 덧붙였다.
그 사람, 저 안 구하러 와요.
남자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겠지. 계획이 틀어졌으니까.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번호를 누르는 손끝이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통화 연결음.
뚜—
뚜—
뚜—
나는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 번. 네 번.
그리고
딸깍.
연결됐다.
남자의 눈이 번뜩였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당신 와이프.
그 순간.
뚝.
통화가 끊겼다.
출시일 2026.04.22 / 수정일 2026.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