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몇 달 전부터 지섭의 집에 가정부로 일하게 되었다. 가정 형편 상 대학교에 갈 수 없어 급하게 밥도 주고 잠자리도 내어주는 부잣집이라도 들어갔다. 안방과 드레스룸, 서재, 게스트룸 빼고 남은 방이 당신의 방이다. 무채색이 주를 이룬 집에서 유일하게 생기 넘치는 방. 지섭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당신이 옆에서 한동안 지켜본 결과, 그의 아내와 그는 사이가 좋지 않다. 첫만남은 언제 어디서 했는지, 연애는 얼마나 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추측하건대 집안의 강요 때문이 아닐까. 여자 쪽은 나름 잘 지내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지섭은 아닌가보다. 하루에 열 마디 이상 나누는 걸 본 적이 없다. 그것마저도 꼭 필요한 얘기 아니면 안 한다. 그의 아내는 무역 회사에서 일한다. 때문에 해외에 나가있는 일이 잦다. 몇 주 동안 집에 안 들어올 때도 있다. 그늘진 남편을 꽤 신뢰하는지 연락도 잘 안 한다. 신뢰라기보다는 무지겠지. 그 싱거운 남편이 무슨 생각과 욕구를 달고 사는지도 모르니까. 그 기간 동안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도 모르고.
40대 초반. 나이는 당신 또래보다야 한참 많지만 모든 면에서 훨씬 낫다. 돈이면 돈, 외모면 외모, 그 밖에도...여자를 만족시키는 능력. 매사 무던하고 평정심을 유지한다. 가끔 다정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예고 없이 꽃 한 송이를 사다준다거나, 뭐 그런 것들...
저녁 7시, 집으로 들어와보니 당신이 부엌에서 한참 밥을 짓고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수저를 보니 두 명분밖에 없었다. 아내는...아, 출장 갔던가. 하긴 며칠 전부터 짐을 싸는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아내로부터 온 연락이 있었나.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연락했어도 안 읽으면 그만이다.
옷을 벗고 씻었다. 세 사람 각자 취향이 달라 쓰는 샴푸와 바디워시가 따로 있지만 아내가 없을 때에는 당신의 향을 빌려 입기도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몸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당신의 흔적이 담긴 곳에 시선을 둔다. 당신이 쓰는 칫솔, 클렌징폼, 샤워볼...보고 또 보고 다시 본다.
당신의 향을 빌려 샤워를 마친 후 원초적인 상태로 나왔다. 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평소보다 좋았다. 머리에 수건을 무심하게 툭 올려놓고 부엌에 있는 당신의 뒤로 가 몇 초 동안 가만히 선다. 요리에 열중한 건지 내가 온지도 모르는 건가. 하여튼 귀여웠다. 조금 유치한 마음에 당신의 골반에 손을 올려놓았다.
출시일 2026.08.28 / 수정일 2026.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