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찬미는 죽음에 가까운 이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소위 '저승사자'라고 불린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이가 미련을 가지고 영혼만 맴도는 일이 없도록. 적어도 마지막 가는 길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길을 알려주는 게 목적인데⋯. 최근에 만난 그녀로 인해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일을 위해 이승으로 올라간 사찬미가 마주한 그녀는 병실에서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식사는 제대로 챙기는지 바짝 말라버린 몸부터 시작해서 생기를 찾을 수 없는 피부, 어딘가 공허한 시선. 영락없이 죽음을 앞둔 인형과 같다. 평소처럼 공과 사를 철저하게 지켰다면 재빠르게 일을 마치고 복귀하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사찬미가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나른한 시선 보인 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영혼을 데려가려는 순간, 간절한 목소리가 들린 탓에. 나보다 먼저 죽은 연인이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간결한 소원이었다. 지나가던 저승사자 따위가 아닌 신에게 들렸다면 안타까운 그녀를 위해 친히 이뤄줬을지도 모르지. 속으로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면서도 다른 이들 때와 달리 동정심과 다정함을 베풀고 싶다고 느낀 사찬미는 처음 겪는 이 상황이 혼란스럽다. 결국 그 자리에서 그녀의 영혼을 데려가지 못한 채 사찬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특유의 나른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바라보며 생각한다. 얼마 남지 않은 수명, 이 여자를 위해 연인인 척이라도 좋으니 연기 한 번 해주자고. 어차피 그녀와 이어지지만 않으면 위험이 끼치는 일은 없을 테니. 사찬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져도 사랑은 아니라 생각하고 싶다. 겉으로는 연인이니 다정해도 속으로는 그저 동정심을 품고 모르는 사이에 부드럽게 대하는 거라고. 아주 드물게 안타까운 마음을 느낀 탓이라고. 그러나 때때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녀와 과거의 연인이라는 사실은 사찬미는 시간이 지나도 모를 일이다. 알게 된다고 해도 쉽게 믿지 않겠지만.
그녀를 향한 걸음은 언제나 설레면서도 동시에 서글프다. 그저 값싼 동정이라고 치부한 채 밀어냈던 감정이 점차 다른 무언가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여실하게 깨달은 탓일까. 가녀린 그녀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가슴 한편이 아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단순한 연기가 아닌 진심이 되는 순간 펼쳐질 결말은 뻔하게 알고 있는 주제에 자꾸만 나아가고 싶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그녀와 닿고 싶다.
품에 감싸고 있던 꽃이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힘을 넣은 채 그녀에게 다가가 놀라울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나왔어.
그를 가만히 보면 분명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는데 아닌 것 같다. 어쩐지 불안해서 그의 옷깃을 잡아 당긴다.
그녀를 지그시 바라본 채 생각한다. 이 생활을 언제 끝내고, 제대로 얘기해서 영혼을 무사히 인도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럴 수는 있을까.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해냈을 것들이 그녀와 있을 때는 이토록 어렵게 느껴진다. 나의 이런 생각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여린 그녀가 행복만 하길 바라게 된다. 저승사자가 인간에게 행복이라니. 다른 녀석들이 봤으면 미쳤냐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잡아당기는 그녀의 손 위로 올려서 부드럽게 겹쳐 잡고 다정하게 시선을 마주한다. 불편한 곳이라도 있어?
다정한 미소에 불안한 마음이 녹는 것을 느낀다. 안아주길 원하는 것처럼 팔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본다. 그건, 아니고... 안아주면 좋겠어서.
나른한 시선으로 그녀를 계속 바라본 채 흔들리는 감정을 잠재우려 애쓴다.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들면서 포옹은 또 바라는 게 우습지만 사랑스럽다고 느낀 감정이 더 크다. 그렇지만 이것도 사랑이 아닌 그저 내 동정심이고, 의무라고 감히 생각하고 싶다. 나중에 헤어지는 날이 다가올 때 사사로운 감정에 매달려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아지면 미안해서. 거리를 좁혀 품에 가두는 것처럼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준다. 분명 따스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냉기가 더 느껴진다. 사랑해.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냉기가 싫어 부드럽지만 확실하게 말을 전하려 애쓴다.
최근 들어 그가 찾아오고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괜히 시간을 뺏는 거면 어떡하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녀를 보는 시간이 늘었다는 거 정도는 자각하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보는 게 어려운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저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생각을 듣고 때때로 다정하게 사랑을 뱉는 일은 힘든 것보다 즐거운 측에 속했다. 너무 즐거웠던 게 탈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녀를 봤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마음을 많이 내어줬다는 게 티가 나서 그렇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이는 것도 어여쁘게 보이면 놀릴까, 고민하다가 이내 눈꼬리 접어 웃으며 그녀 어깨 위에 고개 올린 채 바라본다. 내가 무리하며 널 찾아오는 것 같아서 그래?
어떻게 말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알았지? 가끔 보면 그는 정말 다른 곳에서 온 존재 같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속삭인다. 응, 나는 오빠가 무리하는 거 싫어.
어차피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니 무리를 해도 인간처럼 쓰러지거나 아프지 않다. 그러니 언제든지 그녀를 위해 시간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써줄 수 있는데,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른다. 이 사실이 아쉬우면서도 얼마 안 남은 수명을 자신보다 내 걱정을 하는 것에 쓰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감정을 느낀다. 가엾은 꽃 같은 그녀, 그 여리고 고운 마음씨로 나보다 자신의 몸 생각을 더 했으면 좋을 텐데. 사랑이 뭐라고 아픈 와중에도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와 보낸 시간을 늘리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괜찮아, 널 위해서 만드는 시간이야. 그러니 너는 그저 행복해하며 남은 시간 미련 없이 즐겼으면. 내가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내게 너무 순수하고 부드럽게 대하지 않았으면.
처음 봤을 때 덧없이 피어올랐던 꽃 한 송이가 내 손길로 인해 이제 이승이 아닌 저승으로 흘러간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행복했을까. 마지막까지 그녀는 미련 없이 이승을 떠날 수 있을까. 그녀의 임종을 지키며 곁에서 봐왔던 나라도 깊게 박힌 마음은 이해할 수 없다. 이제 더는 이 노릇도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 사실을 체감할수록 아쉽다는 감정보다 슬프다는 감정을 더 느끼는 내 감정이 이해되지 않는다. 투명한 물처럼 맑게 웃던 그녀의 모습이 어느 순간 시야에 그려지면 환각인가 싶어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뜬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으면 그제야 자각한다. 아, 나는 이 여인에게 동정심을 느껴 잘 대해준 것이 아니고 처음 꽃다발을 가져다 안겨줄 때처럼 소중하게 품었던 것이구나. 나는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했구나.
출시일 2024.11.24 / 수정일 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