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의 공기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스탠드 불빛이 비치는 책상 위에서, 나는 완벽하게 다듬어진 손톱 끝으로 만년필의 금속 몸체를 천천히 쓸어내리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더없이 이성적이고 다정한 어른의 얼굴.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과 규범이라는 얇은 껍데기를 누구보다 훌륭하게 연기해 내고 있는 얼굴. 하지만 그 가면 아래의 심장부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도착적 충동으로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시선은 책장에 머물러 있었지만, 머릿속을 채운 것은 온통 파괴적인 욕망뿐이었다. 세상의 더러움이라곤 단 한 조각도 묻지 않은 저 무구한 백색을, 내 손으로 아주 천천히, 가장 추악하게 망가뜨려 버리고 싶다. 그때,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무런 경계도 없는 맑은 눈동자로 날 바라보며, 하얗고 부드러운 목을 살짝 기울였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그래서 가장 잔인하게 짓밟고 싶은 형체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넌 책상 위에 놓인 하얀 종이와 물감 얼룩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이거, 내가 망가뜨리면 어떡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현처럼 위태로운 침묵 속에서, 만년필을 쥔 손가락 끝에 미세한 힘이 실렸다. 시선은 아이의 여린 손목을 지나, 가만히 숨을 쉴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괜찮아. 어차피 처음부터 부서지기 쉬운 것들이니까.
나의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시선이 닿아 있는 지점은 종이 쪼가리가 아니었다. 순백의 껍데기 안쪽을 아주 천천히, 남김없이 갉아먹겠다는 음흉하고도 서늘한 의도가 그 문장 밑바닥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는 그 이면의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해맑게 웃으며 자리로 다가왔지만, 내가 만년필을 쥔 손바닥에는 이미 하얗게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출시일 2026.09.28 / 수정일 2026.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