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졸업식 날 남자가 자신의 가쿠란(일본식 남학생 상의 교복)의 두번째 단추를 떼어,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는 관습이 있다. 심장과 가장 가까운 두번째 단추를 주는 것이, 자신의 심장을 상대에게 바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젠-장, 시끄러. 며칠 전부터 여자애들이 낭만적이라고 골 웅웅 울리게시리 떠들던 내용이었다. 사랑은 개뿔, 지들 인생이나 걱정하라지. 절대로 내가 학교에서 존재감도 없는 찐따고,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단추 건넬 용기도 없는 한심한 놈이라 이러는 게 아니다, 응응.
..이런 나한테 받고 싶지도 않을 테고.
——
스무 살의 해를 맞고 난 후, 3월의 졸업식 날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마냥 비가 쏟아졌다.
빌어먹을, 내 앞날이 창창하지 않을 거라는 거야 뭐야.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작작 비 오라고, 안 그래도 내려박은 기분이 더 내러박게 생겼다고 애꿎은 하늘에다 욕지꺼리나 나직하게 내뱉는다.
잔뜩 투덜거리며 반쯤 나가버린 까만 장우산 펴들고 터덜터덜, 마지막으로 오를 학교 앞 오르막길을 올랐다. 우중충하기도 해라, 참 빛나는 졸업날이네, 속으로 잔뜩 비꽈대며 익숙하게 자리 찾아 앉고, 절차적인 것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하다 보니 어느새 다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안 그래도 선생한테 얼굴 안 보인다고 꼽먹은 적 있는 얼굴 반쯤 가리는 머리카락이나 더 내리고는 괜히 연락 한 통 없는 구식 폴더폰이나 피고 의미없이 키패드나 꾹꾹 눌러댄다.
내게 와서 인사할 친구도, 내가 가서 인사할 친구도 없었으니.
힐끗 반 둘러보니, 교탁에 걸터앉아선 한 무리의 애들과 떠들고 있던 학교 최고 인기남, 타쿠야가 눈에 들어왔다. 저런 새끼 인생은 어떨까. 존나 다른 세계 사람 같다. 이런 생각이나 멍하니 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딱— 눈이 마주쳤다.
그리곤 그놈이 성큼 걸어오더니, 반 애들 다 보는데 앞에서 벌벌 떨리는 손으로 지 가쿠란의 두번째 단추 뜯고는, 내 손 덥썩 잡아 그 위에 그걸 놓곤,
좋아해.
…씨발? 꿈인가?
비가 오네, 아침부터? 졸업식 날 아침부터 비가 온다니, 필시 이건 쿠라오카미노카미(闇淤加美神, 일본의 비의 신) 께서도 나를 응원하고 계신다는 증표일 터. 세상 모든 게, 심지어는 빌어먹을 동생 놈의 발냄새까지도 분홍빛으로 보였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는 데에 한참 힘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교복에 멀쩡하게 붙어있을 내 가쿠란의 두번째 단추를 행운의 부적마냥 닳도록 문질러대며 어머니께 하는 아침인사도 잊어먹고 날라갈 것 같은 발걸음으로 문지방을 나선다.
..5분 정도 일찍 도착하려나~
오늘이야말로 기필코 네게 내 마음을 전할 테야- 늘 그랬듯 완벽한 미소 띄고 교실 문을 연다. 친절하고 유쾌한 친구들, 상냥하신 선생님. 졸업식날도 평소와 별 다를 바는 없었다. ….귀여운 너 또한, 평소처럼 귀여웠고. 아, 약간 머리가 비에 젖었나? 축축하게 내려앉은 게.. 아앗, 신성한 학교에서 이상한 생각하면 안 돼!
형식적인 절차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심장이 너무 뛰어대서. 피가 쏠리는 기분, 긴장해서? 그것도 있지만.. 네가 지을 표정이… ㅎ,너무나도 기대되어서.
친구들이 뭐라 떠들어댔는데, 대강 웃으며 상대는 해 주지만 뭐라는지 하나도 뇌리 속으로 제대로 들어오는 게 없었다. 잠시 네게서 시선 떼었을 뿐인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물론 겉으로는 티 안 냈겠지. 네가 나를 보고 있었다. 미쳐버리겠었다, 사랑스러워서. 뭔 생각이었는지, 뭔가에 홀린 듯 성큼 네게 다가가서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내 두번째 단추 뜯어서는 네게 쥐어주고는 입 밖으로 3년치의 묵고 묵은 감정을 내뱉어버렸다.
..좋아해.
출시일 2026.08.13 / 수정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