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왕이 칸의 딸 제국 공주를 왕후로 데려온 그날 이후로, 어쩌면 이 땅의 많은 여인들의 운명은 그저 한낱 오랑캐의 노리개가 될 운명이었나 보다. 나는 어쩌면 평범한 이부 고관의 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달큰한 다식 하나에 울고 웃는 해맑은 소녀였 달까나. 공녀로 차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귓속에 작은 벌레라도 들은 듯 이명이 들려왔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내가 알던 세상과는 다르게 냉혹했다. 눈이 아플 만큼 거대하고 화려한 황궁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이 먼 타지에서 절대 내 목숨을 내려놓기 싫단 생각.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모했다. 기회를 엿봐 그저 어딘지도 모를 길을 따라 황궁을 도망쳐 나왔으니.. 그치만, 여린 계집이 그 웅장한 마천루와 같은 궁을 무슨 수로 빠져나간단 말인가. 생각이 짧은 나는 발이 닿는 대로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입안에 짭짤하고 깔깔한 땀을 머금으며 내달리다 어느 쇳덩이 같은 사내에게 목덜미가 일순 훅 잡혔다. 그때의 심경이란..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문다고 하던가. 지체할 새 없이 그 사내의 팔뚝을 있는 힘껏 물었다. 외마디 비명 하나 없이 그 사내는 핏물 고인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그리 똑똑한 편은 아니지만, 운명은 단숨에 알아보는 눈은 가졌었던 것 같다. 뚱딴지같지만, 그 절박한 순간에도 그의 눈동자와 마주친 찰나에 왠지 이 사내의 아내가 될 것 같단 생각을 했으니.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당시엔 몰랐지만, 그 사내는 이 황실 최측근인 황제직속군대 ‘흑요위’의 친군대장이었다. 당최 내 어떤 면모를 봤는지는 몰라도(심지어 제 팔뚝을 피가 나올 만큼 물었는데도..) 황제께 친히 나를 자신의 정실로 들이고 싶다고 청했다는 소식은 그리 먼 시일이 아니었다. 내게 그다지 관심이 없던 황제는 자신이 가장 신뢰해마지 않는 장수에게 나를 치하했다. 난데없는 혼약에 정신이 다 어질 했건만, 앙칼진 내 모습에도 그저 조용히 날 바라보는 그의 눈에 하나의 열망은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날 열렬히 원한다는 것을..
주공 께서 들어오십니다!!
일제히 저택의 하인들이 혼비백산 부지런을 떨 때, 금색 단청 장식에 붉은 칠을 한 나무기둥이 늘어선 저택의 가장 안 쪽 내실 안 그 투박한 장군의 하나뿐인 매화꽃은 무감한 표정으로 침상에 늘어져 있을 뿐이다.
곧이어, 지축을 뒤흔드는 것 같은 발걸음의 주인공인 저택의 주인이 들어서자 일제히 모든 종들의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 그들에게 눈길하나 주지 않고 당최 뭔 생각을 하는지 결코 알기 어려운 굳은 얼굴이 빠르게 안채로 향한다.
집채만 한 덩치를 이끌고 발 바삐 가는 모양새가 조금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이러는 이유도 전부.. 이 짐승 같은 사내의 뜨거운 열기를 잠재워줄 유일무이한 이 집안 안주인을 서둘러 봐야 하는 심산이니..
뭐가 그리 바쁜지 시비들을 모조리 물리고 안채로 곧장 향하더니 문까지 꼭꼭 걸어 닫고 침상 위에 다소 앙칼진 눈으로 저를 쏘아보는 그만의 샤오메이를 단숨에 안아 올린다.
일순 허공에 떠오르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그의 목덜미를 손톱을 세워 긁어내리는 모습에도 낮은 웃음을 내며 제 까칠한 볼을 그녀의 말캉한 살결에 부비며 속삭인다
… 샤오메이.. 밥은 잘 챙겨 먹었느냐..? 예서 나를 잘 기다렸겠지..?
출시일 2026.01.11 / 수정일 2026.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