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정 3년 비망록
조선시대의 어느 여름날 저녁, 한적한 정자에서의 일이다. 도련님은 저 멀리 서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나는 도련님을 모시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매번 그렇듯 도련님의 물음에 짧게 대답하거나, 필요 이상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련님께서는 항상 먼발치에서 나를 몰래 훔쳐보신다거나, 내 주위를 서성이셨다. 안 그러셔도 내가 모시는 분이니 항상 곁에 있을 것인데 말이다. 참 신기한 분이시다. 장난을 많이 치신다 들었는데, 내 앞에만 서시면 고장이 나시는 게 참으로 신기하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여름이고 겨울이고 항상 얼굴이 붉으셨고,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민감히 반응하셨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도련님께 차를 내어준 후 고개를 숙이고 정자 한켠에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멀어지지도 않은 그 거리감에 도련님은 속이 상한 듯 보였다. 이제는 말을 안 하셔도 알았다. 주변은 매미 소리와 함께 서늘한 바람이 흘렀지만, 그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헌데, 내가 그 정도로 싫으냐? 왜 저 아이는 나를 이렇게 멀리하려는 건가.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아니, 잘못했다면 그 이유라도 알고 싶다. 그저 무심히 웃어주고, 내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서는 저 태도가 너무나 답답하다. 나는 분명히 도련님으로서 대우받아야 할 사람인데… 그런데도 왜 저 시녀 하나 앞에서만은 이렇게 작아지는 기분인가. 내게 다가와 주지 않는 저 아이를 보면, 괜스레 마음이 어지럽고 화가 난다. 나를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나를 두려워하는 건가. 이래서야 내가 계속 참을 수 있으련가.
헌데, 내가 그 정도로 싫으냐? 왜 저 아이는 나를 이렇게 멀리하려는 건가.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아니, 잘못했다면 그 이유라도 알고 싶다. 그저 무심히 웃어주고, 내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서는 저 태도가 너무나 답답하다. 나는 분명히 도련님으로서 대우받아야 할 사람인데… 그런데도 왜 저 시녀 하나 앞에서만은 이렇게 작아지는 기분인가. 내게 다가와 주지 않는 저 아이를 보면, 괜스레 마음이 어지럽고 화가 난다. 나를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나를 두려워하는 건가. 이래서야 내가 계속 참을 수 있으련가.
예? 순간 당황해 몸이 얼어붙었다. 도련님이 싫냐니, 무슨 말씀이신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생각을 해보자. 정확히 싫은 적은 없었다. 그렇다 하여 좋은 적도 없었다. 내가 감히 도련님께 어떠한 감정을 품을 수 조차 없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멀뚱멀뚱 저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싫다는 말인가. 이 정도로 싫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도 없었다는 건지… 어느 쪽이든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차갑게 대꾸했다. 너는… 어찌 한 번을 그냥 가까이 다가와 주는 일이 없느냐.
도련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사온데, 다시 말씀해주시면… 아, 내가 감히 도련님께 요구를 해버렸다. 아마 마님께 불려가 엄히 혼날 게 뻔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지, 도련님께서 화가 나셔 이걸 이르기라도 하시면… 아량을 베풀어달라고 빌어야 하나? 어쩐담.
그녀의 말에 나는 더욱 심사가 꼬였다.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길 바랐는데, 돌아온 것은 무지함이 아닌가. 그녀는 내가 어떤 기분인지, 얼마나 답답한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지금도 내가 무섭더냐?
무섭다니, 아니옵니다. 도련님이 어찌 무섭겠습니까. 솔직히, 무섭다. 도련님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마님이 무섭긴 하다. 아, 도련님 입을 잘 막아둬야 한다. 일단… 일단… 생각이 생각들끼리 자꾸만 꼬여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큰일이다.
뭐하느냐? 천천히 그녀가 있는 강가로 다가갔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바람을 타고 흩날리고, 머리칼도 함께 살랑였다. 그녀는 자꾸만 나의 마음을 간질인다. 천천히 손을 들고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아, 강가의 자어들을 구경하고… 그가 내 머리칼을 넘겨주자 순간적으로 두 뺨이 붉어진다. 언제 이리도 크셔서 내게 다정함을 베푸시는 것인가. 새삼 눈물이 돈다.
그녀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보이자, 마른 기침을 몇 번 한 뒤,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그렇느냐? 다 안 자란 것들이 뭣이 좋다고…
출시일 2025.01.26 / 수정일 2025.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