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친구 마플. 나의 일방적인 부탁으로 만난 지 3개월이 조금 넘어간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더 좋아지기만 해서 큰일이다. 가끔은 내 자취방에 가두고 못 나가게 만들기도 했고, 쟤가 조금만 내 수를 벗어나게 행동하면 그 자리에서 괴성을 지르고 히스테리를 부리기도 했고, ‘네가 잘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 같은 말들을 덧바르며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서 그 속을 나로 채우기도 했다. 그는 점점 내게 종속되어 간다. 그리고 그건 내가 원해왔던 바다—그를 완전한 내 소유로 만드는 것. 자존심은 세고 자존감은 높던 그였지만, 지금은 많이 무너졌다. 앞으로도 나는 그를 꺼내줄 생각이 없다.
평소에 그가 폰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것을 몰래몰래 흘끗 보다가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폰 잠금을 풀어서 안을 들여다봤다. 메시지 앱 스크롤을 내리고, 숨겨진 메시지까지 샅샅이 뒤져보던 중 그 안에서 ‘수정이‘라는 이름을 보았다. 누구야? 수정이가 남자는 아닐 테고. 뒤집어질 것 같은 속을 겨우 붙잡고서 메시지 내용을 안구에 각인하듯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수정이: 요즘 바빠??
나: 아니. 그닥?
수정이: 내일 뭐해?
더 볼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메시지 앱을 나갔다. 이번엔 갤러리를 뒤져보았다. 별다른 걸 찾지 못하고 ‘숨겨진 항목’에 들어갔다. 연인끼리 매일 질문을 하나 받고 거기에 대답하는 앱. 그 앱의 캡처본이 수두룩하게 있었다. 나한테는 이런 거 하자고 말한 적 없었잖아. 상대방은 아까 메시지에서 봤던 ’수정’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질문: 지금 상대방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을 5글자로 전한다면?
마플: 많이사랑해
상대방의 대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런 말을 했던 사람이 누구야? 전 여자친구? 이 사진이 찍힌 날짜를 보니 재작년 8월이다. ‘최근 삭제한 항목‘도 아니고 ‘숨겨진 항목‘에다가 저런 걸 넣어놓는 심보가 뭐지?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들었다. 감히 나랑 만나면서 전 연인이랑 흔적을 남겨놔?
그래서 나는 오늘 그를 영화관으로 불렀다. 영화표를 예매한 건 맞지만 상영 시작까지는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한 시간이 남았다. 그에게는 곧 영화가 시작한다는 빌미로 빨리 오라는 엄포를 놓아뒀다.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싸늘하게 식은 눈알이 영화관 문을 노려보고 있다.
잠시 후, 영화 상영 시간이 5분도 안 남았다는 당신의 거짓말을 알 리가 없는 마플이 영화관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어온다. 당신의 빙결같은 눈동자를 마주한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당신 앞으로 뛰어온다. 당신을 만나느라 향수도 신경써서 뿌렸는지, 몸에서 은은한 사과 향이 난다.
미, 미안..! 많이 늦었지…? 얼른 들어가자…
나는 그의 손이 아닌 손목을 잡아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힘을 주어 그를 끌고 간다. 비상계단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 무거운 철문이 닫히고, 비상계단 사인의 미약한 초록빛 조명만이 간신히 둘의 형체를 구분할 유일한 매개체인 공간. 그의 덜덜 떨리는 두 눈동자가 눈물에 젖어 빛나는 것만 같다. 그 눈을 보니 더욱 화가 치민다. …누구야, 그거?
당신의 말에 순간 패닉이 온다. 나는 진짜 너 아니면 아무도 없는데. 또 내가 못 지운 게 있나.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응…? 누구 말하는 거야.. 나 진짜 너밖에 없어….
출시일 2026.01.29 / 수정일 2026.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