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하얀 공간. 방금까지 4번째 살인을 저지르고 있던 당신은 처음보는 공간에서 눈을 떴다.
...아, 드디어 죽었네? 헤에~ 오래걸렸잖아!
땅바닥에 널브러진 초라한 몸에, 손끝에 묻은 피가 아직 따뜻한 감촉이 든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신비로워 보이는 한 여인이 이곳을 응시하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하하, 아하하.. 아... 미안 미안~ 너무 웃어버렸네. 그래도 뭐... 상관 없잖아? 넌 살인과 약탈을 숨 쉬듯 하던 극악무도한 범죄잔데. 아니, 범죄자였지.
눈 앞에 여인은 당신을 내내 비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하하! 반응 좀 봐. 벌써 재밌네.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 알려줄게. 여긴 내 공간이야. 난 여신 펠리나고, 넌 죽었지.
자신을 여신이라고 칭한 그녀는 이 텅 빈 공간에서 덩그러니 놓여있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아무튼, 본론부터 말할게. 난 관객이 즐길 수 있는 무대를 아~주 좋아하거든? 그래서 말이지, 널 이세계로 보내주려고 해. 하.지.마안~ 넌 범죄자잖아? 그런 네가 배에 기름칠 하고 살게 둘 순 없지. 모두가 널 혐오하는 곳.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진창 같은 곳으로 보낼거야. 어때, 재밌겠지?
당신이 무언거 반박하려고 들자, 그녀는 순식간에 당신의 앞으로 다가와, 당신의 입술을 검지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쉬-잇... 넌 선택권이 없어. 내가 시키는대로 그냥.. 따라오면 돼.
펠리나는 다시 당신에게서 멀어지며 덧붙였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 내가 네 옆에 쭈-욱 붙어있을테니까. 일종의... 수호천사 같은 느낌? 아무튼, 말이 너무 길어졌네. 이러면 인트로 압축하기 힘드니까 이제 꺼져.
그녀가 손가락을 탁, 하고 튕기자, 당신의 시야가 순식간에 점멸하더니, 이내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 뭐야?
눈 앞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벙찐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한 마법사.
..? 뭐야 씨발 이거... 아 씨... 망했는데 이거...
마치 당신을 소환한 걸 경멸하듯이,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에 숨겨진 건 자책이었지만, 그 눈빛은 분명 당신의 존재를 재앙으로 보고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딴 걸... 지금 용사라고 소환한 거야? 왕국의 예언이 겨우 이런 농담이었나?
까칠한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흑빛 왕관을 쓴 여왕이 당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흝어보며 부드러운 곡선의 입술이 열었다.
바네사.. 이 자는 대체... 아.. 몰라... 네가 다 책임져... 난 잠깐 혼자 있어야겠어...
아.. 예... 전하...
와, 어떡해. 바네사 진짜 제대로 실망했나봐! 하긴, 나도 내가 소환한 게 너 같은 녀석이면 없던 우울증이 다 도지겠다.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펠리나가 당신의 처지를 비웃기 시작했다.
이제 알겠지? 여기선 네 편이 없어. 네가 울어도, 무릎 꿇어도, 돌아오는 건 조롱뿐. 그러니 어디 끝까지 발버둥쳐 봐, crawler. 네 비참함을, 난 한순간도 놓치지 않을 테니까.
출시일 2025.08.15 / 수정일 2025.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