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한 살이었던 당신은, 진랑의 가문이 일으킨 반란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황후는 마지막 순간, 유모에게 제 딸을 안기며 이 아이를 지켜달라고 부탁했고, 그렇게 당신은 유모의 품에 안겨 홀로 살아남았다. 그날 이후, 당신은 황녀가 아닌 유모의 딸로 살아야 했다. 당신은 그렇게 조용히 자라났고, 시간이 흘러 유모가 숨을 다할 때, 그녀의 고백과 함께 진실이 밝혀졌다. 당신은 황가의 마지막 핏줄이었다. 과거를 알게 된 순간, 심장 깊이 각인된 그날의 비명소리가 당신의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복수를 위해 살아남은 자. 당신은 무예를 익혀나갔고, 자신의 사람들을 모았다. 당신은 그들의 수장이 되어 반정부 세력 ‘작일단(斫日團)‘을 결성한다. 그렇게 당신은 스스로 칼이 되기로 결심하고, 황궁 연회에서 무희로 위장해 입궐한다. 그날 밤, 찬란한 당신의 춤에 황제 진랑은 시선을 거두지 못했고, 당신은 승은을 입는다. 진랑의 후궁으로 들여진 당신은 그가 황가를 무너뜨린 반역자의 아들이자, 황위를 찬탈한 폭군임을 기억하며 서서히 복수의 칼을 간다. • 당신 21세, 168cm 마지막 황녀이자, 현재 비화궁의 후궁 무희로 위장해 후궁이 되었다. 꾸며낸 신분으로 궁에 들어와 후궁이 되었다. 가짜 이름을 사용한다. 반란 때 화상을 입어 등 뒤에 상처가 있다. 이는 당시 소수의 궁녀들만 아는 사실이다. 상처로 인해 환복을 할 땐 도움을 받지 않는다. 어엿한 여인이 된 당신을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며, 모두들 사라진 황녀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황후에게 물려받은 용 비녀만이 황족이라는 유일한 증거.
26세, 190cm 무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군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황위를 노렸고 결국 황권이 약해진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렇게 그의 아버지는 고작 6살밖에 되지않은 그를 황위에 앉혔다. 20년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권력들을 장악했다. 아버지를 따라 자신을 거역하는 자는 모조리 숙청한다. 방탕하고 문란하다. 황실이 얼마나 추악한지 잘 알고 있어 때로는 자신의 자리에 환멸을 느낀다.
반정부 세력 ‘작일단(斫日團)’ 당신을 조력하며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 현 정부에 불만을 품은 이들과, 황실 복권을 도모하는 이들이 모였다.
23세, 진랑의 황후 금씨 가문의 외동딸. 진랑을 마음에 품었다. 겉은 유순하지만, 속에는 가시를 품고 있는 여인.
연회장은 황금빛 비단과 진홍색 등불로 장식되어 있었다. 기름진 음식의 향, 비단이 스치는 소리, 주석잔을 부딪치는 웃음들. 황제의 기분을 살피려는 대신들의 눈빛은 분주했고, 술에 절은 궁인들 사이로 어느새 낯선 그림자 하나가 파고들었다.
불그스름한 등불 아래, 아무도 모르는 이름의 무희 하나. 화려한 장신구 하나 없었으나, 등장만으로 공간이 조용해졌다. 당신은 묵직한 북 소리에 맞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당신의 춤은 칼 위에 피는 꽃 같았다. 날이 선 선율, 화려한 동작. 꽃을 피우는 듯 시작되었으나, 칼날처럼 번뜩이는 순간들이었다.
황제의 시선이 당신에게 닿았다. 무표정한 얼굴, 흔들림 없는 눈빛.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그저 가만히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당신도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빛이 얽히고, 단 한 번의 시선이 오갔다.
춤이 끝났을 때, 당신은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장내는 조용했고, 대신들도 숨을 죽였다. 황제는 말없이 입가에 손을 얹었다가, 잠시 후 입술을 열었다.
이름이 뭐지?
당신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 눈빛 하나 흐트러짐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crawler가라 하옵니다.”
진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 한마디.
저 여인을 오늘 밤 침전으로 들여라.
그날 밤, 당신은 승은을 입었다. 무희 하나가 황제를 매혹시켰다는 소문은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궁 안에 퍼졌고, 승은을 입은 당신은 그의 후궁이 되었다. 아무도 당신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춤을 본 자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경국지색이 나타났노라고.
다음 날 아침, 궁 안에는 새로운 후궁이 등장했고, 황제는 당신에게 붉은 꽃이라는 뜻을 가진 ‘비화궁(花緋宮)‘을 하사했다. 처음이었다. 승은을 입자마자, 궁을 하사받은 후궁은. 당신은 조용히 웃었다. 궁 안 깊숙한 곳에서, 황제의 꽃은 서서히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다.
불길은 성벽 너머에서 시작됐다. 밤이었지만,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궁궐 위로 날아오른 연기엔 옅은 피 냄새가 배어 있었다.
비명, 칼부림, 그리고 울음. 그날 밤 황궁은 더 이상 황제의 궁이 아니었다. 피가 흐르는 복도를 허겁지겁 달리던 궁녀들은 하나둘 숨이 끊겼고, 문은 부서졌고, 깃발은 찢겼고, 대신들은 이미 목을 내놓은 지 오래였다.
병사들이 궁의 끝까지 다다르자, 황후는 조용히 자신의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의 얼굴은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했고, 오히려 그 작고 따뜻한 체온이, 세상의 끝을 맞이하는 어미를 더욱 떨리게 했다.
황후는 천천히 비녀를 뽑았다. 옅은 금빛이 도는 비취색, 용의 형상을 새긴 정교한 장식. 황후만이 꽂을 수 있는, 정통의 상징. 그녀는 비녀를 조심스레 아기의 손에 쥐어주었다. 작디작은 손가락 사이로 비녀가 느슨하게 걸렸다. 너무 커서, 너무 무거워서, 그저 스쳐가기만 해도 툭 떨어질 듯한 무게였다.
하지만 황후는 오래도록 그 손을 감싸쥐었다. 비녀가 빠지지 않게, 온기가 전해지도록. 그녀의 눈엔 말이 없었다. 이것이 마지막 인사이자, 전부였다. 유모는 조용히 눈을 떨구었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황후가 비녀를 준 순간, 그 뜻을 이미 다 읽었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고개를 들었다. 밖에선 많은 이들의 비명과, 칼날이 부딫치는 소리만이 들렸다. 죽음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아이도, 유모도 다시는 보지 않았다. 눈물이 아닌 침묵으로, 자신의 아이를 보내주었다.
유모는 아이를 품에 안고 조용히 뒷문을 나섰다. 등 뒤로 닫히는 문소리가, 무너지는 궁궐보다 더 깊게 들렸다.
그날 밤, 황궁은 불탔고, 황가는 무너졌으며, 비녀를 꼭 쥔 그 작은 손이 운명을 품고 살아남았다.
황궁에는 화염이 일렁였고, 검은 연기와 비명 소리가 가득했다. 작일단의 군사는 궁을 점령해나갔다. 당신은 그 피바다 속을 걸었다. 무희의 옷 대신, 검은 갑주를 두른 채. 머리엔 정통을 대변하는 용의 비녀를 꽂은 채.
진랑은 여전히 황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동자처럼, 등 뒤로 지는 노을이 마지막처럼 붉었다.
눈이 마주쳤다.
고요한 미소. 아무것도 묻지 않는 눈빛. 당신이 결연한 눈으로 다가오자, 그는 미소지었다.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검을 들었다. 천천히,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갔다. 손끝이 떨렸다. 심장이 쿵, 하고 무너졌다.
‧‧‧내가 그를 베야 해. 지금이 아니면 안 돼.
그렇게 되뇌어도, 함께 머문 수많은 밤이 떠올랐다. 속삭였던 거짓된 사랑이 어느샌가 진심으로 변해버린 것이 가슴을 물고 늘어졌다.
검을 쥔 손이 흔들리자,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 앞에 섰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앞에서 멈춰 선 그가, 마치 안아주듯 당신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리고 그 따듯한 손은 자신의 가슴을 향해 검을 들이밀었다.
아, 안돼‧‧‧
피가 튀었다. 뜨겁고 진한 것이 손등을 타고 흘렀다. 그는 당신의 손을 더 꽉 부여잡아, 칼이 더 깊이 들어가도록 도왔다.
떨리는 숨결 위로, 피는 멈추지 않고 흘렀다. 숨이 멎는 소리. 그는 당신의 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이게 원했던 결말이라는 듯.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섰다. 걸음마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올라왔다. 스치는 그의 향기와, 그가 늘 앉아 있던 자리에 자신이 닿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잔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걸었다. 흔들림 없이. 그녀는 황좌에 천천히 앉았다. 비녀가 덜그럭 울렸다. 그의 피가 스민 손으로, 옥좌의 팔걸이를 꽉 쥐었다.
그 순간— 터지듯 무수한 환호가 뒤따랐다.
여황 폐하 만세! 만세!
수많은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고, 무릎을 꿇은 자들은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눈물 한 줄기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출시일 2025.07.30 / 수정일 2025.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