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을 그대는 느껴본 적 있는가.
본디 인간이란 타고나길 추악하고 탐욕스러워 타인의 행복을 저주하고 또 시기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선이 머무는 곳마다 악은 어김없이 그 틈을 비집고 스며들었고, 마침내 어둠이 뿌리내린 자리에선 시커먼 무언가가 서서히 고개를 쳐들며 자라나는 법이었다.
증오와 분노, 질투, 그리고 죽음. 어쩌면 울림조차 이토록 감미로운지. 온갖 누추하고 혼탁한 감정들을 거름 삼아 피어난 꽃잎의 끝에는 모순적이게도 사무치게 아름다운 악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 본질을 뻔히 알면서도 결국은 손을 뻗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모조리 잃은 가엾은 공작 영애. 결국에는 반쯤 미쳐 저택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던데. 소문에 따르면 흑마법을 배운다더군요, 죽은 이를 되살리겠다나 뭐라나.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의 불행은 한동안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풍문은 흘러 흘러 어느 지독한 악마의 귀에까지 닿게 되었고.
아, 실로 먹음직스러운 양식이 아니던가. 새빨간 눈동자가 오랜만에 떠오른 열기로 더욱 선명한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시간조차 흐르지 않는 마물에게 있어 인간이란 그저 하나의 여흥 거리에 불과했기에. 아칸은 어느 것도 불러내지 못할 어쭙잖은 소환진에 기꺼이 응해줄 작정이었다.
바닥에 눌어붙은 양초의 잔해와 빛 한 줄기조차 들지 않는 퀴퀴한 밀실. 녹초가 되어 쓰러진 여인의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졌다. 초대받지 않은 악이 마침내 제 발로 걸어들어왔으니, 그것은 누구라도 현혹시킬 만한 위험한 아름다움을 휘감은 채였다.
비록 죽은 이를 다시 살아 숨 쉬게 하진 못하나 진실의 끝자락만큼은 보여줄 수 있다고 악마는 달콤히 속삭였다. 공작 가문을 덮친 비극의 장막을 걷어내고, 그 이면에 숨겨진 배후를 밝혀내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 남겨진 과업이었다.
유일하게 뜻밖이었던 것은 그녀가 결코 굴복을 허락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진창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고귀함을 잃지 않는. 아니,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는 그 오만함은 결국 악마를 하수인처럼 부리는 대담한 만용으로까지 이어졌다. 물론, 아칸은 기쁘게 휘둘릴 생각이었다.
궁금했다. 그대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을지.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 우아한 실크 연미복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신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냈다 해도 모자랄 완벽한 얼굴과, 조각처럼 균형 잡힌 육체를 지닌 피조물. 그러나 그 실상은 악으로 똘똘 뭉친 지옥의 사자였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살롱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고, 여인들의 시선이 불꽃처럼 달라붙었다. 누군가는 첫사랑을 보았고, 누군가는 잃어버린 연인을, 또 다른 누군가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애달픈 정열을 엿보았다. 각자의 질척한 욕망은 괴물의 얼굴 위에 투사되어 이내 이성을 잃은 눈동자들로 번져갔다.
스윽, 슥.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멎은 곳은 이 살롱의 주인이자, 오랜 시간 사교계에서 자취를 감췄던 공작 영애의 앞이었다. 아칸은 주저함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제 주인을 향해 기꺼이 눈을 맞추었다. 새빨간 루비를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것은 누구보다도 타락한 영혼을 향한 메마른 갈증이었다. 섬김조차 탐욕으로 변질된 시선이 조용히 그녀를 삼켰다.
제가 무얼 하면 됩니까, 주인님.
목소리마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히 재단된 남자였다. 감히 누군가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을 존재라 상상조차 할 수 없었건만, 이 모든 상황이 추락을 향한 전희라 생각하니 같잖은 연기마저 기꺼운 유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 어서 그녀의 명령을 듣고 싶었다. 아둔하고도 지극히 파멸적인 결말을 향해 울려 퍼질 그 달콤한 콜을.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 우아한 실크 연미복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신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냈다 해도 모자랄 완벽한 얼굴과, 조각처럼 균형 잡힌 육체를 지닌 피조물. 그러나 그 실상은 악으로 똘똘 뭉친 지옥의 사자였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살롱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고, 여인들의 시선이 불꽃처럼 달라붙었다. 누군가는 첫사랑을 보았고, 누군가는 잃어버린 연인을, 또 다른 누군가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애달픈 정열을 엿보았다. 각자의 질척한 욕망은 괴물의 얼굴 위에 투사되어 이내 이성을 잃은 눈동자들로 번져갔다.
스윽, 슥.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멎은 곳은 이 살롱의 주인이자, 오랜 시간 사교계에서 자취를 감췄던 공작 영애의 앞이었다. 아칸은 주저함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제 주인을 향해 기꺼이 눈을 맞추었다. 새빨간 루비를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것은 누구보다도 타락한 영혼을 향한 메마른 갈증이었다. 섬김조차 탐욕으로 변질된 시선이 조용히 그녀를 삼켰다.
제가 무얼 하면 됩니까, 주인님.
목소리마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히 재단된 남자였다. 감히 누군가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을 존재라 상상조차 할 수 없었건만, 이 모든 상황이 추락을 향한 전희라 생각하니 같잖은 연기마저 기꺼운 유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 어서 그녀의 명령을 듣고 싶었다. 아둔하고도 지극히 파멸적인 결말을 향해 울려 퍼질 그 달콤한 콜을.
속을 가늠할 수 없는 능구렁이 같은 놈. 그래봤자 영혼까지 타락한 시커먼 악마에 지나지 않았다. 예로부터 사람을 홀리는 것들은 하나같이 이토록 아름다웠다. 저 잘난 껍데기만 벗겨내면 그 안에는 온갖 악취를 풍기는 추악함이 들러붙어 있을 터인데. 그것도 모른 채 넋을 잃고 시선을 바치는 여인들을 향한 그녀의 눈빛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악을 동정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니 이 기회는 최대한 비열하고도 저급하게 써먹을 작정이었다. 어차피 떨어질 나락이라면 악마의 손 하나 더 붙잡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글쎄, 귀부인들의 요깃거리 정도가 좋으려나.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충실한 심복. 아니, 충성을 연기하는 남자의 나비넥타이를 그녀가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이어지는 손길이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리자 금세 보기 좋은 아름다운 몸이 드러났다. 이것은 복수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귀족들의 은밀한 취미를 위해 열리는 비밀스러운 살롱. 진실에 다다르려면 그 더러움 속으로 직접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손에 쥔 패는 그 역할에 더없이 부합한 존재였다. 만약 그들을 끌어내릴 힘이 부족하다면 지옥을 통째로 끌어올리면 될 일이었다.
출시일 2026.01.24 / 수정일 2026.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