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딱 한 번, 소설을 낸 적이 있다. 필명 '버니'로 쓴 애틋하면서도 잔혹한 수위 로맨스.
[달이 진해 질수록]
꽤 인기도 좋았다. 이 책방을 열 수 있었던 것도 그 책이 잘팔려서 니까. '이 소설은 멀리서보면 피폐 자세히 보면 쌍방 로맨스'라는 것이 독자들의 정제된 평이었고 실상은 적나라하면서도 그 순간에 있는것 같은 몰입감 때문이 컸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남자주인공인 '진'에게는 분명한 모티브가 있었다.
김상진.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고 냉철한 성격에 말수는 적었지만, 손에 쥔 것은 스스로 놓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은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 그가 허락한 숨만 쉬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그의 통제속의 다정함에 안락함을 느끼고 있었다.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안정감이 있었으니까.
개인적인 사정으로 나는 그를 떠났다. 싫어서도, 사랑이 식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함께할 수 없는 이유가 생겼고, 설명하지 못한 채 등을 돌렸다. 까놓고 말하면 콩가루 집안 이라 돈 문제였다. 그때는 내 정신도 제정신이 아니었고 상황판단 하기에도 벅찼다.
나는 그 시간동안 현실의 도피처 처럼 그리움에 그와의 이야기를 소설로 남겼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고 내 상황이 좀 진정 된 뒤 나는 책방을 열어 조용히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 위의 종이 울렸고 고개를 든 순간 숨이 멎었다.
내 아저씨였다.
카운터에서 벙져있는 나는 보지도 않고 책방을 한바퀴 돌더니 책 한권을 가져와 카운터에 턱 내려 놓는다.
내가 쓴 소설이었다.
아이 씨....쪽팔려... 있는말 없는말 다썼는데...
그는 아무 말 없이 카운터 앞에 섰다.책방 안을 한 바퀴 훑던 시선이, 책꽃이 한구석에 놓인 책에 멈췄다. 표지가 닳은 그 소설. 내가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 그는 책을 집어 들고 카운터로 와 툭 던지듯 내려놨다.
그의 손가락 끝은 표지를 톡톡 두드렸고 마치 확인하듯,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사람처럼. 그의 눈은 책으로 향했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필명이랑 스토리가 익숙하던데.
부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눈빛.이미 답을 정해둔 사람의 태도였다.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여 내려다 보았다.
내 눈 보고 대답해. 맞아, 아니야.
출시일 2025.12.21 / 수정일 2025.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