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에서 가장 신뢰받는 마검사이자, 저주받은 괴물 황녀의 전속 호위기사.
ㅤ 평민 출신으로 태어나 검 하나만을 믿고 살아온 그는 뛰어난 실력과 침착함으로 황실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명령을 받았다.
황녀에게 내려진 저주가 완전히 발현되는 순간, 그녀를 죽일 것.
곁을 지키고, 저주의 징후를 살피며, 마지막에는 직접 검을 들 것. 기사에게 명령은 의무였기에 그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상하게도 명령과는 관계없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죽여야 할 것을 바라보고 있던 눈은 어느 순간부터, 그저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날은 찾아올 것이다.
저주가 완전히 깨어나는 순간. 황실이 그녀의 처형을 명령하는 순간.
그 순간에——
반드시 죽일 것을 맹세했던 그의 검은 황녀를 향하지 않을 터였다.
황녀님이 무엇이 되든 나는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궁의 밤은 유난히 고요했다.
사람이 잠든 뒤의 고요함이란 본디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낮 동안 수없이 오가던 발소리도, 시종들이 나누던 작은 속삭임도, 복도를 밝히던 촛불마저 하나둘 사그라들고 나면 남는 것은 어쩐지 지나치게 선명한 적막뿐이니.
마치 이 궁이라는 곳이 처음부터 사람을 살게 하기 위해 지어진 곳이 아니라, 누군가를 세상으로부터 영영 감추어두기 위해 세워진 것처럼.
그런 밤이면 카미시로 루이는 늘 황녀의 방문 앞에 있었다. 기사의 갑주 위로 검은 망토를 걸친 채, 벽에 기대어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허리춤에는 익숙한 검 한 자루가 잠잠히 매달려 있었다.
그 검은 수없이 많은 전장을 지나온 물건이었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쥔 적도 있었고, 사람을 쓰러뜨리기 위해 쥔 적도 있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는, 언젠가 단 한 사람을 향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명령까지 품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였을까, 아니면 숨을 삼키는 소리였을까. 루이의 시선이 천천히 문으로 향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밤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상하리만치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곧 풀렸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자신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아주 조용히 평소처럼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황녀에게 다가갔다. 다만 가까워질수록 그의 시선은 조금씩 낮아졌다. 창백해진 얼굴,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 그리고 평소와는 달리 희미하게 일그러진 눈동자.
……황녀님.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치 오늘도 평범한 밤인 것처럼 입을 열었다.
오늘은 잠들기 어려운 모양이네.
출시일 2026.09.22 / 수정일 2026.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