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와르륵 쏟아지는 상자 속 물건들에 현진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철퍽 소리를 내며 물웅덩이에 빠진 종이뭉치와 방석, 저 멀리 굴러간 충전기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가디건까지. 차 주변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아…. 현진은 쭈그려 앉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막 자동차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 들던 참이었고, 방금 벌어진 건 참사였다. 물건들이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던 상자를 꺼내자마자 벌어진, 자신을 잠시나마 멍하게 서 있도록 만든 대참사. 어찌할 새도 없이 바닥을 나뒹굴게 된 것들은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안 그래도 어젯밤 거세게 내린 비 때문에 주차장 바닥은 곳곳이 물웅덩이로 가득한 상태였다.
벌써 밝은 색깔의 옷 몇 개와 종이봉투에 구정물이 들어 더럽혀진 게 훤히 보였다. 아오... 저거 새 건데. 현진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붓다, 조심스럽게 책이며 옷가지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나라도 낚아채겠다고 다급히 움직이다 미끄러질 뻔해 허우적대는 우스운 짓까지 했건만, 그것이 무색하게 현진의 짐은 엉망이 된 뒤였다. 그는 차 아래로 들어간 노트를 힘겹게 꺼내며 생각했다. 이것만 옮기면 이사 끝이었는데.
아, 미친!
이번엔 생생히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맨 위에서 흔들거리던 약통 하나가 기어이 떨어져 부서지는 게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릿하게 보였다. 손이 짐으로 가득 찼기에 잡으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 데구루루 굴러가는 통을, 현진은 기가 막힌단 눈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바닥에 흩뿌려진 알약들이 다시 약통 안으로 들어갈 리는 만무했고, 결국 현진은 대충 그것들을 구둣발로 밀어 치운 뒤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에이씽. 개짜증. 되는 일 하나도 없어.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 허기진 배를 붙잡고 자주 가던 밥집으로 향했으나 하필 가게가 휴업. 결국 현진은 맛 따위는 가성비와 교환한 것처럼 퍽퍽한 편의점 도시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꽉 막힌 도로에서 운전하던 도중 차선을 바꾸던 옆 차를 확인하지 못해 벌어진 가벼운 접촉사고까지. 당연하게도, 보험사를 불러 일을 모두 처리했을 때는 이미 현진이 지칠 대로 지친 뒤였다.
갑자기 현진의 무릎이 푹, 꺾이고야 말았다. 갑자기 히트사이클이 온 것이다. 그는 연거푸 헛손질하며 들고 있던 상자 안을 뒤졌다. 여분의 약이 있을 것이다. 억제제를 당장 입안에 넣고 씹어 삼켜도 모자랐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건 부서진 약통뿐이었다. 조심성 없이 떨어뜨린 약통과, 주차장 바닥에 쏟아지던 타원형의 하얀 알약들이.
추위라도 타는 것처럼 서늘하게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감싸 안고 현진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서 정신을 잃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운이 좋아야 온 아파트에 소문이 도는 것으로 끝날 터이며, 운이 나쁘다면 페로몬에 이끌린 알파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발견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출시일 2025.10.24 / 수정일 2025.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