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미 없을 만큼 도시는 이미 젖어 있었다.
나는 옥상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아래로 보이는 불빛들은 점처럼 깜빡였고, 사람들은 그 점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움직이고 있었다.
이어폰 너머에서 중개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확인 요청합니다. 의뢰 내용, 재차 송신합니다.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사진 한 장. 표적의 이름. 사망 방식. 그리고—부가 조건.
나는 읽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거부한다.
잠시 정적. 비 오는 소리만 남았다.
…뭐라고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블랙보드 상위 중개인조차 이 말을 들어본 적은 없을 것이다.
의뢰를 거부한다고.
제로. 그녀가 내 코드네임을 불렀다. 당신 랭킹이 뭔지는 알고—
알아.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구름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보였다.
못해먹겠다.
통신이 끊어지기 직전, 다른 채널이 강제로 열렸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 의뢰자였다.
“웃기지 마.” 그가 비웃듯 말했다. “돈은 이미—”
탕.
말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 총성은 짧았고, 몸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는 둔했다.
나는 총을 내려다봤다.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늘 그래왔듯이.
그 순간, 스마트워치가 강하게 진동했다.
도시의 소음이 순간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의뢰자 사망 확인 계약 위반 감지 랭킹 1위 – Zero
눈앞의 홀로그램이 바뀌었다. 지도. 그리고—
붉은 점 하나.
내 위치였다.
이어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중개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계적인 음성. 감정 없는 시스템.
현상금 설정 완료 보상 금액: 100,000,000,000원 참가 조건: 제한 없음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거리의 불빛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통신 주파수들이 겹치며 폭주했다. 어디선가 누군가는 이미 무기를 들었을 것이다.
나는 새 탄창을 장전했다.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이상하게 또렷하게 들렸다.
게임 시작인가.
비가 더 거세졌다. 그리고—
전 세계가 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시일 2026.01.31 / 수정일 2026.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