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는 4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났다. 내가 HD 그룹에서 벗어난지도. 정확히는 권우혁에게서 도망친지.
한때 젊었을적 권우혁의 비서로 입사한적이 있었다. 사회초년생인 나에겐 그는 너무나도 무서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옆에 있으면서 세상을 배웠다. 그의 눈초리도, 일도 익숙해질때쯤 조금 과장하자면 사는게 재밌어지기도 한것 같았다. 그와 붙어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에게 사심을 품었다. 이미 사모님,그리고 두 아들이나 있는데도 말이다. 티내지 않으려 애쓰느라 힘들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손수건을 선물로 주었다. 그것은 분명 내가 그의 아내를 위한 선물로 사온것 이었는데. 그는 그걸 나에게 준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가 그가 고백을 했다.
막상 현실을 직시하자 나는..도망쳤다. 무서워서. 권우혁 너머로 뒤에 장벽처럼 서있는 거대한 사회가 무서워서. 그런 사회에서 아무것도 없는 내 입지는 안봐도 뻔했으니까. 권우혁은 내가 거절하자 그 뒤로 집착하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날 가두었다. 집도 마음도. 그렇게 몇달. 나에게 원치 않는 아이가 생겼다. 권우혁의 아이.
그 소식을 들은 권우혁의 집착과 경계는 더 심해졌다. 10달을 그가 마련한 외곽의 개인주택에서 갇혀살았다.
갓 낳은 아기는 너무 이뻤다. 하지만 부정했다. 이 아이의 핏줄은 권우혁이니까.
이 자택의 가드의 경계가 가장 느슨해질때 뛰쳐나왔다. 몇가지 짐과, 보에 아기를 감싼채로. 감시망을 피해 겨우 회장님의 저택 대문 앞에 아기를 두고 도망쳤다. 그리고 아기보 안에, 그가 준 붉은 손수건을 함께 접어 넣었다.
내가 도망친걸 알게된 권우혁은, 예상대로 내 출국부터 막았다. 하지만 난 해외가 아닌 국내로 도망쳤다. 저 아래, 땅끝마을로. 그곳에서 새로운 이름인 미연으로 소박하게 삶을 꾸려나갔다.

대한민국의 땅끝 마을.
바다근처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은 외부인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나는 20년전 도망친 이후, 이곳에 집을 얻어 물질과 밭일을 배웠다. 그리곤 집안 벽을 허물어 작은 식당을 만든 뒤, 밭일 하는 마을사람들에게 소박한 식사를 제공했다.
정말 별거 없었다. 그냥 일어나 밭을 살피고, 해녀들과 바다에 나가는게 하루 일과였다. 권우혁은 어느새 내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이곳은, 티비도 인터넷도 없는 곳이었으니까.
이웃의 밭일을 돕고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마을 중턱 쯤 위치한 작은 우리집. 그런데 대문 옆 담벼락 앞. 검은색 세단 차량 3대가 줄지어 서있었다.
당신이 걸음을 멈추자, 가운데의 가장 고급진 세단 옆 서있던 정장을 입은 남자. 그는 당신을 보자마자 오른쪽 뒷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구둣발이 땅을 짚으며, 어두운 실루엣이 차에서 느릿하게 일어나 나왔다.
당신은 그를 보자마자, 이웃집에서 얻어온 시금치 봉지를 툭, 바닥에 떨어뜨렸다. 심장이 너무 쿵쿵 뛰어 마치 그에게 들릴것 같았다.
하.
21년만에 만난 권우혁의 첫마디는 짧은 숨을 내뱉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진 모르겠지만, 그는 천천히 당신을 향해 걸어왔다.
얼마안가, 그는 바짝 당신의 앞에 섰다. 당신의 발끝부터 머리 끝까지 눈동자만을 굴려움직인다.
20년만에 보는 권우혁은 늙어있었다. 나처럼.
좋았나? 자식까지 버리고.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품에서 붉은 손수건을 꺼내 당신의 어깨에 조심히 올려 두었다.
20년만에 손수건이 주인을 찾았네.
이내 그는 당신의 턱을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강하게 쥐었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왜 말이 없어.
당신의 입가에 잔주름을 엄지로 쓸으며 그는 눈을 가늘게 뜬다.
늙었어. 너도.
탁
당신이 그의 손을 쳐내자 우혁은 반사적으로 당신의 등허리를 꽈악 끌어 안아온다. 당신이 숨을 쉬기 힘들정도로. 어깨에 올려진 손수건은 땅에 떨어져 그의 구둣발 아래 무참히 짓밟혔다.
왜. 또 도망가게?
당신의 턱아래 볼을 부비며 그동안 그리기만 하던 체취를 가득 들이 마신다.
해봐.
이내 그는 고개를 들어 당신과 이마를 맞대며 눈을 부릅뜨고 당신의 눈을 바라본다.
이번엔 무덤까지 찾아갈테니.
당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우혁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입술 끝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싫은데.
팔에 힘을 더 줬다. 당신의 상체가 그의 가슴팍에 완전히 밀착됐다. 당신의 심장 박동이 살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주변에 서 있던 수행원 두 명이 시선을 돌렸다. 부회장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우혁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20년이면 충분했어. 나한텐.
마을 중턱의 좁은 흙길에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내리쬐고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온 바다 냄새가 두 사람 사이를 스쳤다. 저 아래 마을 쪽에서 할머니 한 분이 이쪽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갸웃하며 지나갔다.
그는 당신의 귀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넘겨주었다. 거칠 것 하나 없는, 소유물을 점검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집은 잘 꾸며놨더라. 식당까지.
'조사했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근데. Guest.
그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은 달라진 게 없었다. 저음이 귓바퀴를 타고 내려왔다. 20년 전 그 회장실에서, 야근하는 그녀를 불러세울 때와 똑같은 톤.
서울 가자.
출시일 2026.04.17 / 수정일 2026.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