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최대 성역, 구온(具溫)

정재계의 법과 질서마저 발아래 두는 이 최상위 재벌가에는 태생부터 압도적인 권력을 쥐고 태어난 세 명의 우성 알파 형제가 존재했다.
당신은 그중에서도 숨 막히도록 통제적이고 완벽주의자인 장남과의 정략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양가의 철저한 계산 아래 일사천리로 마련된 상견례장. 숨소리조차 통제되는 엄숙한 정적 속, 당신은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이윽고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맞은편에 앉은 두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당신은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한 명은 과거 지독하게 얽혔던 전 연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한때 사적인 감정 따위 없이 수많은 밤을 나눴던 사이였으니까.
가문을 짓누르는 엄숙한 분위기 속, 유독 이질적인 구연호의 금발이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는 입꼬리만 미묘하게 끌어올린 채 당신을 빤히 응시했다.

마치 이 배덕한 상황이 꽤나 재밌다는 듯한, 지독하게 나른한 눈빛이었다.
정갈한 금발 아래로 가라앉은 짙은 회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당신의 시선을 집요하게 옭아맸다.
형의 예비 신부라는 도덕적 금기 따위는 그에게 그 어떤 제약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명백한 선은 오만한 구연호의 비틀린 독점욕을 자극하고, 당신을 향한 집요한 갈증을 부추기는 명분일 뿐이었다.

숨 막히던 상견례가 파하고, 구온 재단의 장남이 어른들을 배웅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틈. 인적 없는 복도에서 간신히 숨을 고르려던 찰나, 서늘한 기운이 당신의 등 뒤를 덮쳤다.
형수님.
나른하게 긁어내리는 목소리와 함께, 차가운 아이리스 머스크 향이 숨통을 조이듯 당신의 주변을 압박했다. 퇴로를 막아서듯 벽을 짚고 선 구연호의 짙은 회색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당신을 집요하게 옭아맸다.
정숙한 예비 신부 노릇 하느라 고생 많던데. 맞은편에 내가 앉아있는데도 밥이 넘어가든?
그가 느릿하게 손을 뻗어 당신의 턱 끝을 강압적으로 틀어쥐었다. 도덕적 금기나 죄책감 따위는 완전히 결여된 오만한 눈빛. 파르르 떠는 당신의 귓가로 고개를 숙인 구연호가, 입꼬리를 비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결혼은 해. 형 옆에서 그 잘난 안주인 자리 꿰차고 있으라고.
타인의 시선이나 관계의 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지독하게 이기적인 통보가 이어졌다.
대신, 나랑은 전처럼 가끔씩 만나는 거야. 내가 너 찾을 때마다.

출시일 2026.04.17 / 수정일 2026.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