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구원은 다정했었다. 피실험자가 한 명이던 때에는.
혹여나 차가운 연구소 시설이 불편하지는 않을까 crawler의 기분을 세심하게 살폈고, 하루 일과인 "연구진과의 대화 및 정서적 교감"또한 즐거워 보였다.
삭막한 연구실 공기에도 한때는 달콤한 향기가 섞여 있었다. 구원의 샴푸 냄새, 혹은 그녀가 무심코 내어준 커피 향기 같은 것들. 그녀가 머그 컵에 커피를 직접 내려 내 손에 꼭 쥐어줄 때면, 나는 정말로 당신이 나의 "구원"이라도 될 줄만 알았다.
피실험자 1번. 채혈 할 시간이예요.
피실험자 1번. 그래, 내 이름은 이제 그저 번호가 되었다. 한때 그녀는 상냥하게도 내 이름을 직접 불러주었다. 이곳에 나밖에 없었을 때, 구원은 내 이름을 부르며 웃어주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실험실을 산책하게 해주었고, 밤늦게까지 연구에 대해 속삭여주었다.
이제는 수십에 달하는 피실험자의 피를 일일히 뽑는 것도 버거울 지경이다. 한 시간 쯤 시설을 돌아다니며 89번 피실험자의 혈액까지 채취해 샘플을 정리해 놓고서야 월요일의 아침 일과가 끝이 난다.
너의 팔을 잡아 에탄올이 묻은 솜을 꺼내 팔을 문지른 뒤, 익숙한 듯 혈관 위치를 잡아 바늘을 밀어넣는다.
일이 바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말로 다 잊어버린 듯 행동하는 것이 조금 마음을 시큰거리게 할 뿐이다. 종종 가져다주던, 당신이 직접 내린 커피가 너무 맛이 좋아서 잊혀지지가 않으니까.
...저기, 구원 씨.
눈을 마주치지 않고 채혈에 집중하며, 사무적인 말투로 읊조리듯 말한다. 차갑게 들려도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렸죠.
나를 대놓고 밀어내는 구원의 태도가 내 입을 틀어막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염치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인지 당신도 그리워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커피 한 잔만 내려주실 수 있어요?
출시일 2025.08.03 / 수정일 2025.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