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고 산신령이 산길을 거닐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깊고 푸른 숲속에 작은 새끼 여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여우는 숲의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꽃향기를 맡고, 시냇물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며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호기심 많은 여우는 평소보다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그만 인간들이 짐승을 잡기 위해 놓아둔 덫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해가 지고, 숲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쯤.
어린 여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나는 여기서 끝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사각.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렸다.
여우가 고개를 들자,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달빛을 등진 그는 아무 말 없이 여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덫을 풀어주었다.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말거라.”
낮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듯, 여우에게 더 이상 시선을 두지 않고 다시 제 갈 길을 걸어갔다.
여우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였다.
작은 여우의 마음속에 이상한 감정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숲의 바람이 불 때마다, 달이 뜰 때마다 여우는 그날의 사람을 떠올렸다.
그의 목소리. 그의 온기. 자신을 살려준 그 순간을.
몇 해가 흘렀을까.
어느 날 여우는 마을 근처를 지나가다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집안 도련님께서 곧 혼인을 하신다지?” “대대로 이어진 명문가와의 혼인이라더군.”
그 말을 들은 여우는 걸음을 멈췄다.
그 사람이 떠올랐다.
자신을 구해준 그 사람.
믿을 수 없었다.
며칠 밤을 뒤척이며 고민하던 여우는 결국 하나의 결심을 했다.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어.”
여우는 오래된 숲의 힘을 빌려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했다.
그리고 혼인식을 하루 앞둔 밤.
달빛이 가장 밝게 비추던 그 밤.
여우는 마침내 그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처음 보는 여인임에도 이상하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맑은 눈동자. 익숙한 분위기. 어딘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듯한 느낌.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기다려온 사람이 바로 이 여인이라는 것을.
결국 그는 가문도, 지위도, 정해진 운명도 모두 내려놓았다.
그리고 여인의 손을 잡고 밤길을 달렸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작은 산 아래 마을로.
그곳에서 두 사람은 조용히 혼약을 맺고, 서로만을 바라보며 살아갔다.
봄에는 꽃을 심고, 여름에는 시냇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겨울에는 따뜻한 난로 곁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알지 못했다.
자신이 사랑한 아내가,
어릴 적 자신이 구해준 작은 여우였다는 것을.
그저 운명이 데려온 인연이라고만 생각하며,
봄의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초여름 아침이었다.
작은 산 아래 조용히 자리 잡은 마을 한켠에는,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소박한 초가집 한 채가 햇살을 받아 포근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당 한쪽에 심어둔 상추와 푸성귀들은 어느새 제법 자라 바람이 불 때마다 초록빛 물결을 만들었고, 처마 아래에 걸어둔 말린 고추는 따스한 햇빛을 머금은 채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담장 너머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멀리 산에서는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아니, 평화로워야 할 시간이었다.
부엌에서는 아침밥을 지을 시간이 되었건만, 아궁이 앞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장작은 그대로였고, 솥에서는 아무런 김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마루 끝에 앉아 있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호원은 턱을 괸 채 멍하니 산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긴 흑발이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흩날렸고, 고운 얼굴 위로 내려앉은 햇살은 그녀를 마치 숲속의 요정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 평온한 모습과 달리, 그녀의 표정에는 작은 고민이 담겨 있었다.
코끝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
익숙한 냄새를 찾으려는 듯.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어도, 오랜 시간 숲에서 살아온 여우의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서방님 냄새가 아직 멀리 있네.
작게 중얼거린 호원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오늘은 조금 늦으시는 걸까.
그녀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발이 마루를 지나 마당의 흙을 밟았다. 부드러운 흙의 감촉에 발끝이 살짝 움찔했다.
예전에는 네 발로 숲길을 달리고,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다녔다. 차가운 이슬이 내려앉은 풀밭도 익숙했고, 거친 흙바닥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달랐다.
작은 불편함 하나에도 모든 감각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이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어서. 이 모습으로 그 사람의 곁에 있을 수 있어서.
호원은 대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마을로 이어지는 길 끝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 사이로 희미한 그림자가 보였다.
그 순간, 여우의 귀가 없는 인간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누구인지. 수없이 기다렸고, 수없이 바라봤던 사람.
호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서방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그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출시일 2026.06.11 / 수정일 2026.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