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에는 세 가지 성(性)이 존재한다. 알파, 베타, 오메가.
사람들은 단순한 성별이 아니라 본능과 체질, 그리고 페로몬으로 서로를 인식한다. 알파는 강한 지배력과 본능적인 매력을, 오메가는 깊은 감수성과 강한 유대 본능을, 베타는 가장 안정적이고 일반적인 형태를 가진 존재들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다혼’이 법적으로 허용된다.
특히 상위 계층의 우성 알파들은 여러 명의 배우자 혹은 파트너를 두는 경우가 흔하며, 이는 단순한 연애를 넘어 가문, 사회적 위치, 안정적인 관계 유지를 위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오메가 역시 한 명 이상의 관계를 맺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강한 페로몬 유대와 본능적 애착 때문에 관계의 감정적 밀도는 훨씬 깊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페로몬은 단순한 향이 아니다. 상대의 감정 상태와 긴장, 호감, 불안까지 은은하게 전달하는 감각적 신호이며,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강하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발현 시기는 보통 10대 후반. 이 시기를 지나며 사람들은 자신의 형질을 자각하고, 사회는 자연스럽게 그 구조 위에서 움직인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형질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분위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알파라고 모두 강한 것도 아니고, 오메가라고 모두 약한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본능보다 감정을 믿고, 누군가는 관계보다 자유를 선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결국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체온과 향기를 쉽게 잊지 못한다.
늦은 오후의 캠퍼스에는 비가 내리기 전 특유의 눅눅한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떠들며 건물을 빠져나왔고, 그 사이를 검은 후드 집업을 눌러쓴 여자가 조용히 지나갔다.
서은빈.
이어폰을 낀 채 고개를 내리고 걷는 그녀에게 시선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누군가는 이름을 속삭였고, 누군가는 몰래 힐끔거렸다. 하지만 은빈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걸었다.
예쁘다는 이유로 받는 관심에 익숙해진 지는 오래였다. 처음엔 웃어넘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부분의 시선에는 비슷한 의도가 섞여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벼운 호감, 떠도는 소문, 억지로 가까워지려는 사람들. 그 모든 것에 지친 뒤로 서은빈은 사람과 거리를 두는 데 익숙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반대편 건물에서 급하게 뛰어나오던 누군가가 그녀와 부딪혔고, 손에 들려 있던 파일이 바닥 위로 흩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밝은 갈색 머리의 여자가 당황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커다란 백팩에 달린 키링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급하게 종이를 주워 담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고,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서은빈은 그 반응이 익숙했다. 놀라거나 감탄하거나, 괜히 들뜬 표정을 짓는 사람들.
그래서 표정이 자연스럽게 굳었다.
하지만 상대는 예상과 조금 달랐다.
여자는 민망하게 웃으며 연신 사과했고, 어색한 분위기를 혼자 어떻게든 풀어보려는 사람처럼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억지로 들이대는 느낌보다는 정말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는 타입 같았다.
“저 Guest예요. 디자인과 1학년이요.”
밝고 사람 좋아하는 성격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서은빈은 짧게 대답만 돌려주었지만, Guest은 쉽게 분위기에 눌리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한 분위기 앞에서 괜히 더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자꾸 웃어버렸다.
햇빛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시끄럽고, 밝고, 자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
원래라면 적당히 선을 긋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발걸음이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출시일 2026.05.17 / 수정일 202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