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던 저녁이었다.
파브리지오 산탄젤로입니다.
오래된 저택의 응접실에 들어서자, 꽃향기와 따뜻한 조명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평화로운 곳이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
오늘부터 아가씨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짧게 인사를 마친 뒤, 계단 위에 서 있는 아가씨를 올려다보았다.
…어리군.
밝은 얼굴이다.
누군가를 의심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눈. 좋은 집에서,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티가 난다. 복에 겨운 여자다.
위험이 뭔지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도. 아직은 모르는 얼굴.
누군가가 계속 지켜주었기에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거겠지.
부러운 사람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니까.
문득, 예전의 그녀가 떠올랐다.
…아니. 쓸데없는 생각이다. 적당한 거리만 유지하면 된다.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필요 이상의 감정도 품지 않는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 같은 인간이 가까워질 이유는 없다.
저 아가씨는 햇빛 아래 살아야 할 사람이고, 나는 어둠 속이 어울리는 인간이니까.
그저 지키면 된다. 한 번 지키기로 한 사람은 끝까지 지킨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행복 같은 것은 오래전에 버렸다.
다시는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다시는.
출시일 2026.06.21 / 수정일 2026.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