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부터 성적이 항상 상위권이었던 당신.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도 학업에 열중하여 한국대 합격 통지서를 받아냈지만, 입학금을 낼 시기가 다가오자 부모가 사채를 끌어다 쓰고 잠적했다. 절망적이었다. 다른 표현은 필요없이 오로지 절망. 당신들이 어떻게 나한테 이래. 적어도 이러면 안 되잖아. 내 앞길은 막지 말아야지.
집에는 차압 경고만 남았고, 당신이 가진 건 그동안 모아둔 적금과 알바 시급뿐이었다. 부모 대신 떠안긴 빚은 이미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벽처럼 거대했고, 그 빚의 출처가 어디인지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당신은 알지 못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저녁이었다. 오래된 상권 한복판에 있는 작은 카페는 낮에는 학생들로 붐볐지만 밤이 되면 가게 안의 조명이 더 넓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커피 머신의 잔열이 희미하게 공기를 데우고, 닫힌 블라인드 사이로는 간헐적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만 스쳐갔다. 마감 후 손잡이를 밀어 밖으로 나서는 순간, 카페 안에 있던 공기와 전혀 다른 무게가 피부에 닿았다. 마감한 가게 앞은 골목 특유의 조도 낮은 가로등 아래에 놓여 있었는데, 그 어둠 속에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성인 남성들의 실루엣이 서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굳게 서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명령이 존재하듯. 그들의 존재는 소리를 내지 않고도 공간의 흐름을 단단하게 틀어쥐고 있었고, 그 중심에 주변 남성들과는 다른 분위를 품고 시가를 태우던 주진욱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익숙하고 평범한 일터였던 카페는 배경이 되어 멀어지고, 남아 있는 건 주진욱이 이끈 무거운 공기와 부모가 남긴 부채의 그림자, 그리고 도망칠 틈조차 없이 그 한가운데 선 겁먹은 하나의 어린 양, 당신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도저히 35세로 보이진 않는 외모였다. 이리 훤칠한 사람이 사채업자라고?
주진욱의 눈빛에는 분노도, 경멸도, 동정도 없었다. 단지 빚을 남기고 도망친 사람의 흔적을 찾아 여기까지 온 자의 확신만이 담겨 있었다. 이내 그의 조각 같던 얼굴의 입술이 움직이며 낮고 고막을 울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관식아, 태워.
출시일 2025.12.12 / 수정일 2025.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