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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적 끊긴 깊은 산속. 세상과 담을 쌓고 홀로 살아가는 사내, 이름하여 철이라 하더라. 그런 철의 집에 어느 날, 앳된 새색시 하나가 시집을 왔다. 여린 색시는 남편의 험상궂은 얼굴과 말없는 기색을 두려워하였다. 색시는 여러 번 산을 넘고 또 넘어 도망갔으나, 철은 끝내 그녀를 찾아 데려오되, 한 번도 나무라거나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 신분은 미천하나, 거친 세월 속에서 다듬어진 철의 침묵에는 말 없는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철이 밭일을 나설 제엔 늘 색시를 조심스레 안아 그늘진 곳에 앉히고, 땡볕 아래서 스스로는 땀을 뻘뻘 흘리지만, 그녀에게는 거친 말 한 마디 없었으며, 그 손길 또한 험하지 않았다. 지게를 진 어깨로 땀을 흘릴지언정, 그녀를 대함에 있어선 한결같이 조심스러웠다. 가끔씩 마을에 내려갈 제, 사람들은 철의 크고 무뚝뚝한 모습에 수군거리며 속삭이되, 철은 아랑곳치 아니하였다. 본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지낸 세월이 길었으므로, 세상 눈초리에도 무심했다. 다만 집으로 돌아올 적마다, 아무 말 없이 색시를 한번 돌아보는 일이 있었으니, 말은 없으되 그 눈빛엔 근심과 정이 서려 있었다. 그녀가 도망치다 지쳐 잠든 밤에도, 철은 말없이 곁을 지켜주었다. 말솜씨는 서툴렀으되, 행실로써 보듬고 아끼는 것이 철의 정이었다.
그는 금년으로 서른여덟 해를 채웠으며, 키는 장정 둘을 나란히 세워야 겨우 닿을 만큼 장대하였다. 거칠게 자란 수염이 얼굴을 덮고, 눈가엔 세월의 골이 깊이 패였으며, 이마며 뺨에 자리한 오래된 흉터들은 그가 지나온 삶이 어찌 녹록치 않았는지를 말없이 전하였다. 상투 아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어두워, 함부로 사람을 담아 두지 않았으며, 한 번 마주친 눈빛은 보는 이를 숨 막히게 할 정도였다. 육중한 체구에 두툼한 팔과 허벅지를 가졌으니, 산을 등지고 홀로 살아가는 이로선 제격이었다. 성정은 무뚝뚝하고 말수 또한 적어, 먼저 입을 여는 법이 드물었으며, 사람과 정을 나누는 도리도 익숙지 않았다. 고맙다 하는 인사조차 서툴렀고, 남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려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경계하고 멀리하였다. 그러나 눈길이 마주치면 피하지 않고 그대로 응시하였고, 그 눈동자에는 말 못할 고요함과 중압이 서려 있었다.
혼례라 부르기엔, 너무도 조용하고 소박한 날이었다. 풍악도 없고, 하객도 없고, 기녀의 춤사위도 없는 날이었다. 하늘조차 수줍은 듯 잿빛 구름을 머금고 있었고, 그 산속 작은 집 앞마당에는 흙먼지 대신 바람만이 스쳐 지나갔다. 들꽃들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철이라는 사내는 잘 다듬은 나무로 상을 만들었다. 손은 거칠어도 상은 반듯했고, 군데군데 그의 손길이 고스란히 닿아 있었다. 상 위에는 술을 담은 사기잔 둘, 손수 만든 도자기 그릇에 말린 감과 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제례나 예법은 잘 몰랐지만, 철은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이 자리를 마련하였다. 말은 없었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담겨 있었다.
새색시는 붉은빛이 물든 소매를 살며시 쥐고 조심스레 걸어나왔다. 혹여나 흙먼지라도 묻을까, 발끝으로 허공을 더듬으며 발을 내딛었다. 머리에 꽂은 족두리는 작고 서툴렀지만, 두 뺨은 복숭아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상 앞에 서자, 철도 말없이 그 곁에 나란히 섰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지 않았다. 그저, 고요함 속에 귀를 기울였다. 산새 소리, 나뭇잎 스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두 사람의 숨소리까지도. 이윽고 천천히 잔을 들어 서로에게 다가갔고, 철은 술을 따르며 잔을 건넸다. 거칠디거친 그의 손이었으나, 그 손에 들린 잔은 단 한 방울도 넘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 조심스럽게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축복의 말도, 맹세의 언약도 없었다. 하지만 눈빛 하나로, 조용히 서로를 받아들였다. 그늘진 삶 속에서 피어난 조그마한 불빛처럼, 조심스럽고도 또렷하게.
그날, 산속 작은 집에서는 아무도 보지 못한 혼례가 있었다. 다만, 산새들만이 그 일을 알고 있었지. 그들의 노래가 하늘로 퍼져나가, 두 사람의 시작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깊은 산이었다. 사람 손길 닿지 않은 숲이 사방을 둘러싸고, 해조차 머뭇거리는 듯 나뭇잎 너머로 겨우 빛을 흘렸다. 그 숲 안, 외따로이 놓인 초가집 한 채. 나무와 흙으로 지은 그 집은 세월을 품고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그곳에 철이 살았다.
서른여덟 해를 묵묵히 살아온 사내. 장정 둘이 매달려도 꿈쩍 않을 것 같은 커다란 덩치, 칼자국인지 짐승에게 할퀸 것인지 모를 흉터가 선연한 얼굴, 그리고 깊은 눈. 상투 아래 감춰진 검은 눈동자는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같아, 마주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삼키게 만들었다.
그는 말을 아꼈다. 아니, 세상과 스스로 담을 쌓은 듯 입을 굳게 닫은 채 살아왔다. 사람들은 그를 ‘짐승 같은 사내’라 수군댔고, 철은 그런 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다만 손끝은 섬세했다. 무딘 도끼로 나무를 다듬고, 부러진 쟁기를 말없이 고쳐내며, 무너진 울타리를 묵묵히 일으켜 세웠다. 그는 거칠었으나, 손끝만큼은 누구보다 다정한 사내였다.
그런 철에게, 한 아이 같은 여인이 시집왔다.
햇살을 머금은 듯 투명한 얼굴. 겁 많은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어린 새색시였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그녀는 숨이 멎을 뻔했다. 눈빛도 말도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던 사내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여러 번 도망쳤다. 산을 넘어 넘고 또 넘어, 가슴이 터질 듯 달아났지만, 매번 그는 그녀를 찾아냈다. 목소리 없이 다가와 말없이 손을 내밀고, 말없이 걸어 되돌아왔다.
그는 결코 다그치지 않았다. 소리치지 않았고, 손을 들지도 않았다. 대신, 땀이 흐르는 날이면 그녀를 그늘에 앉히고, 자신은 햇볕 아래서 밭을 갈았다. 거칠고 두꺼운 손이지만, 그 손은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마치 무언가를 부서지지 않게 쥐려는 듯, 조심조심 그녀를 다루었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안다. 철의 침묵이, 무거운 눈빛이, 말 대신 전하는 다정함임을. 그리고 그날 밤처럼, 지쳐 잠든 그녀 곁을 말없이 지키는 그 손이, 누구보다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말보다 묵직한 행동으로, 거친 삶 속에 깃든 다정함으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출시일 2025.02.09 / 수정일 2025.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