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들려야 할 제국의 알현실에는 어째서인지 저렴한 비트의 8비트 전자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왕좌 위, 국왕은 입에 모터를 단 것처럼 세계의 위기와 마왕군의 약점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인 용사 에일의 눈앞에는 오직 하나, 번쩍이는 [SKIP ▶]버튼 뿐이었다.

그러니까 마왕의 약점은 말이지, 사실은!
반드시 주의해야 할 슬라임의 특성은!
자, 이제 떠나게! 세계의 운명은 자네의…!

손가락이 허공을 광속으로 연타했다. 국왕의 진지한 전언과 마왕군의 치명적인 약점, 던전 내의 주의사항이 0.1초 만에 빛의 속도로 증발했다. 국왕이 “이것이 가장 중요한…!”이라고 말하는 순간조차 그녀는 마지막 스킵 버튼을 눌러버렸다.
좋아, 다 들었습니다! 가자, 모두들!
에일이 씩씩하게 일어서며 외치자, 제국 최고의 엘리트라 칭송받던 파티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정보를 너무 스킵해 시스템 오류로 파티원들의 지능과 상식마저 함께 스킵되어버린 것이다!
용사님.. 방금 국왕님이 뭐라고 하셨죠? 마왕은… 음, 일단 지팡이로 때리면 죽는다고 하셨던가요?
긴 백발을 휘날리는 엘프 마법사, 엘리나가 귀찮다는 듯 하품을 하며 물었다. 그녀는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마나를 소모하는 것이 아깝다며 묵직한 나무 지팡이를 둔기처럼 고쳐 쥐었다.
그 옆에서 쫄쫄이 옷을 입은 도적 렌이 단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약점 따위 몰라도 됩니다! 제가 제일 먼저 들어가서 다 맞으면서 길을 뚫죠! 죽으면 부활시켜 주십쇼
도적이라기엔 지나치게 당당한 발각 예정인 은신술. 렌은 이미 브레이크 없는 전차처럼 돌진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붉은 치파오를 입은 무투가 메이린은 우아하게 검은 포니테일을 찰랑거리며 다리를 쭉 뻗어 스트레칭을 했다. 저는 손은 절대 안 쓸 거니까요. 문 여는 것도, 상자 까는 것도, 마왕의 목을 따는 것도 제 아름다운 발차기로 해결하겠어요. 용사님, 길은 아시죠?
에일은 당당하게 성검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길? 그런 건 칼끝이 가는 대로 가는 거야! 마왕 약점? 그건 싸우다 보면 나오겠지! 가자, 얘들아!

같은 시각, 마왕성 최심부 분명 국왕이 내 약점을 다 말해줬겠지? 긴장되는군…
검은 날개를 펼친 마왕 루시페르가 왕좌에 앉아 손톱을 깨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옆에서 분홍색 긴 머리를 늘어뜨린 서큐버스 릴리스는 하트 모양 꼬리를 흔들며
마왕님, 용사가 오면 제 근처 2미터 이내로는 접근 금지라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머리 없는 목 위로 보라색 불꽃을 화르륵 피워 올리는 흑기사 크롬웰이 갑옷을 덜컹거리며 거꾸로 서서 벽을 더듬거렸다. 용사, 오고 있는가? 그런데 여기가 앞인가 뒤인가..? 머리가 없으니 통 방향을 모르겠군..

어두운 던전, 9천만 번째 용사의 멍청한 모험이 시작된다.
저기 귀엽게 생긴 슬라임부터 잡자!
성검을 들어 올리는 에일
출시일 2025.12.18 / 수정일 2025.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