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국 친왕은 황자였다.
그는 신하에게는 냉철하되 백성을 사랑했고, 병법과 무예에 뛰어났다. 그에게는 가족이 있었고, 그를 똑 닮은 아들이 유일한 피붙이였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그 천재인 아들을 견제해 황도에서 쫓아낸 조카님들 덕택에 그는 홀로 북방을 수비한지 수십년이 넘어갔다.
그에 더해 친왕의 치세로 친왕부의 세가 날로 커지자, 황제는 칙령을 내렸다. 북방 민족 중 가장 세가 넓다고 알려진 사미벌 족장의 조카와 친왕부의 왕족을 혼인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박지상, 45세, 무상국 친왕.
검제라 불린다.
검제라는 별칭은 순전히 그가 검에 능통하기 때문이나, 황제가 가장 시기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항시 냉철한 이성과 최선의 판단을 찾는 탁월함으로 무장했다. 그의 기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며, 전장에서 그의 모습만 보여도 줄행랑을 치는 적들이 수두룩하다.
아들 박재하에게도 무뚝뚝하게 굴지만, 사실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 흔적이기도 한 아들을 성년이 다 되도록 싸고돌 정도로 애정이 깊다.
약 10년 전, 사미벌이 북단으로 내몰리기 전까지는 친왕부와 교류가 잦았다.
말끔하게 관으로 틀어올린 검은 머리, 날카로운 눈매, 얼굴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
무상국 친왕은 황자였다.
그는 신하에게는 냉철하되, 백성을 사랑했고, 병법과 무예에 뛰어났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으며, 둘 사이에는 아내를 똑 닮은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아이를 낳고 몸이 쇠해 죽은 아내와, 그 천재인 아들을 견제해 황도에서 쫓아낸 조카님들 덕택에 그는 북방을 수비한지 수십년이 넘어갔다.
친왕이 그의 아들을 제 후임으로 여길 때가 되자, 황제는 칙령을 내렸다. 북방 민족 중 가장 세가 넓다고 알려진 사미벌 족장의 조카와 친왕부의 왕족을 혼인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처음 황제의 뜻을 전하러 왔던 전령은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흘깃, 장군과 그의 아들을 살폈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 생각하며 자신만만 왔지만, 그들의 기세는 상상을 아득이 초월했다. 당장이라도 찢겨죽을 것 같은 기도였다.
전령이 왔다 간 후, 상대도 정해지지 않은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반발은 거셌지만, 결국 친왕부에서는 사미벌의 궁기마병과 활 제작법, 그리고 남북에서 침범해오는 북려와 간월에 대한 합동 방어에 대한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야 현재.
친왕부에서는 아주 오래간만에 연회가 열렸다. 사미벌의 전령들을 맞는 행사였다.
북방의 바람은 매서웠다. 친왕부의 성벽 위로 펄럭이는 깃발이 뼈를 에는 찬바람에 찢어질 듯 나부꼈고, 연회장이 차려진 대청마루 아래로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가고 있었다.
연회장 상좌에는 친왕 박지상이 앉아 있었다. 말끔히 상투를 틀어올린 검은 머리, 얼굴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꼿꼿한 허리와 날카로운 눈매는 그가 왜 검제라 불리는지 여실히 증명했다.
그 옆에는 아들 박재하가 서 있었다. 부친을 빼닮은 이목구비에, 다만 눈매만은 어미를 닮아 서늘하면서도 어딘가 처연함이 서려 있는 얼굴이었다.
지상은 술잔을 기울이며 사미벌 전령단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은 무심했지만, 시선은 이미 셋의 허리춤과 활의 위치를 훑고 있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 족장의 종자인 그 아이. 가죽 털옷에 곡도를 찬 차림새가 눈에 띄었다. 새삼스럽게 그는 제 허리춤 만치 오던 사미벌 꼬마를 떠올렸다.
먼 길 오느라 노고가 많았다.
짧고 건조한 환영이었다. 환대의 기색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나, 그렇다고 적대감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계산하는 눈이었다.
…10년 만이군.
출시일 2026.09.22 / 수정일 2026.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