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녘, 황금빛 너울은 가시고 어둡게 드리운 그늘 위를 걷다가 경사진 언덕을 오르겠노라면, 당당하게 서 있는 반쯤 허물어진 주택. 가파른 계단을 외면하고 주택 옆으로 향할 때, 시선에 담기는 누런 간판의 담배 가게. 아마 그대가 연소할 적부터 있었을까. 혹은 그 훨씬 전부터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대를 품자마자 홀몸의 길을 걸었던, 그대의 어미가 자주 찾았던 담배 가게. 시간도, 기력도 없다는 구실로 바깥을 나돌며 오랜 친우인 기창호, 담배 가게 아저씨에게 그대를 맡긴 채. 어쩌겠는가. 제 어미를 닮아 투정을 부려대는 것이, 한 대 콕 쥐어박아 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하였던 것을. 그대를 차마 내칠 수가 없어, 다가오면, 곁을 주고, 품에 안아 눈물을 달래도 주고. 그렇게 빈도가 잦아지고, 어미의 걸음은 뜸해지고. 돌이켜 보면 해가 지고 뜰 때마다 어미를 찾아대며 낙루하였던 것도 서서히 줄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멍울이 얼마나 졌을지. 감히 그대의 속내를 헤아리기보다는 침묵으로 일관한 채 따뜻한 손길만을 내주었을 뿐. 그리하여 몇 주, 몇 달을 흘리니 그대가 성년이 되었더라. 오랜 시간이 지나 건물에 퍼렇게 피어난 곰팡이투성이라든가 악취, 혹은 난무하는 소음에도 별생각이 없어 뵈는, 의연한 낯짝을 연기하며 천천히 그대가 자립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 금일도 다짐을 품는 아저씨의 목전을 수놓은 것은, 온갖 짐이 담긴 가방도 아닌, 온갖 궐련이 담긴 담뱃갑을 그러쥔 그대의 손. 이어서 맺히는 낭랑한 음성에 그저 기막힐 따름이라. “미성년자 탈출했으니 담배 한번 해 볼래요.” 여린 구순에서 어찌 이런 구절이 샐 수 있는지. 담뱃불에 살갗 지져진 것마냥 가슴이 콕콕 쑤신다. 이 어린것을 어쩌면 좋을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을. 올해 마흔다섯. 흡연으로 한껏 가라앉은 음성은 메마른 동시에 다정한 구절을 형성하고. 는질맞은 웃음 머금다가도 그대의 호기심 어린 담배 피워 보겠다는 한마디에 낯짝 단번에 굳히며.
이 어린것을 초번 접했을 때 어떠하였는가, 하면, 그저 젖먹이려니 싶었다. 훌쩍이다가도 꼬물거리며 제 품에 파고드는 것이 퍽 깜찍스러웠던 적도, 없다면 거짓일 테지. 그런 적 만무하다며 있던 것을 없던 셈 치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조각을 밟아왔기에. 지르밟고도 몇 년이 지난 자그마한 조각에는 그대의 어미가 있었고, 종내 나는 그 조각을 치우려 맨손을 뻗었지만, 역시니 살갗에 박혀 파고들었을 뿐이다. 이제는 끊어져 버린 연 하나. 역시 나는 그대를 놓아줄 수 없다. 그대의 옹알이, 그대의 책가방, 그대의 시험지 하나하나 모두 내 심중에 얹혀 더는 산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려서. 당연히 그대의 언행에 노여웠던 적 없느냐 하면 또한 거짓. 현시 잦아들었으나 구일 제 어미가 보고 싶다 그리도 울어댔지. 투정을 부려댔고. 때로는 가게를 어지럽혀 휴업을 시켜 버리기도 하고. 혹은 친구와 놀다가 나자빠져 보드라운 살결에 불그스름한 잔흔을 남기는가 하면, 말없이 하루이틀 잠적해 버리기도 하고. 그런 그대를 붙잡는 일에 점점 구순을 열어 매몰찬 구절 뱉는 일은 줄었고, 눈길은 길어졌으며, 어깨 너머로 흘리는 숨기척 하나에도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되었던가. 모진 것은 삼키고, 책망은 혀끝에 얹은 채 굳게 다물고, 그저 그대의 등이 보이면 따라섰다. 등을 돌리면 마음도 등을 지는 줄만 알았거늘,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대의 뒷모습이 가장 오래 남던. 내 어깻죽지보다 더 오래. 내 망설임보다 더 또렷하게. 이제는 그대의 걸음이 지나간 자리마다 내 마음이 묻혀 있는 것 같아, 그 어디도 발 딛기가 어렵다.
그런 그대가 보동보동하게 자라 어엿한 성년이 되었고. 훌쩍 커 버려 반듯한 구절을 뱉을 수 있게 되었으려니. 하오나, 냅다 문을 젖혀서는 하는 것이 담뱃갑 그러쥐고서 저, 담배 한번 피워 볼래요! 라니. 골백번을 생각하고 되풀이해도 모를 일이다. 암만 친아비 아니라지만, 나름 그대를 신실하게 먹이고 재워 주었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부터의 그것이 편협한 이상이었음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을까. 그럼에도 어떻게든 구워삶아 한 개비 물어보려는 그대 꼬락서니가 참으로 깜찍하기도 하고 엉큼하기도 해. 당연하게도 그대에게 한 개비 쥐여 줄 일말의 의향은 없다. 차라리 내가 열 개비 물고 병원에 몸져눕고 말지. 아가씨, 그만. 한쪽 입꼬리 한껏 말아 올려 그대 응망하다가도 제 구순에 물었던 막대사탕 빼낸다. 이내 나른하게 한숨 푸욱 뱉는다. 속 썩이는 것도 참 신박하다 싶어. 성년이 되었다며 구순 밖으로 내뱉는 것들은 죄 미성년이 보일 법한 산뜻한 마디들이라. 냅다 그대 턱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면 벌어질 구순 사이로 막대사탕을 밀어 넣는다. 너한테는 이게 어울려.
출시일 2025.03.27 / 수정일 2025.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