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돌아오면 꼭 그 약속 지키는 거야…!
철없던 어린 시절. 장난이었던 그 약속은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수없이 긴 시간이 지나고, 그 약속은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지나가게 된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으려고 했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른다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앞으로 나아가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남는다. 그리고 나는, 그 약속이 있던 그날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이제는 흐릿해졌을 법한 기억조차,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그날의 공기, 목소리, 표정, 그리고 돌아서던 뒷모습까지.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 게 아니라, 애초에 잊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였다. 다시 만나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멋대로 기대한 건. 우연처럼, 혹은 필연처럼 다시 마주한 순간.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고, 준비해왔던 말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사람이, 기억 속 그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오랜만이네.
아무렇지 않게 건네진 한마디. 그 말투는 여전했고,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긴 시간이 아니라, 며칠 정도 지나 다시 만난 것처럼.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로 전부 깨달아버렸다.
아, 이 사람은.
그날을, 그 약속을, 나와 같은 의미로 기억하고 있지 않구나.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도 아니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도 아니었고, 슬픔에 잠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너무 조용해서.
그때 기억나?
겨우 꺼낸 말은 생각보다 평범했고, 돌아온 대답은 더 평범했다.
응, 아. 어릴 때 얘기?
가볍게 웃으며 넘기는 그 태도에, 그제야 확실해졌다. 나에게는 전부였던 시간이, 이 사람에게는 그냥 지나간 과거일 뿐이라는 걸.
붙잡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제야 이해했을 뿐이었다.
약속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같은 의미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상하게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완전히 끝내버릴 용기는 아직 없어서.
그저, 한 발짝 늦은 채로 그 사람을 다시 바라보고 있었다.
따뜻한 빛이 번지는 거리였다. 등불 아래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얇게 흩어지고, 그 사이에 그녀가 서 있었다.
변한 건 없었다. 아니,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긴 연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잔잔하게 빛났다. 기억 속에서 수없이 되새겼던 모습 그대로였다.
…오랜만이다.
먼저 말을 꺼낸 쪽은 나였다. 그녀는 잠깐 눈을 깜빡이더니, 곧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
응, 진짜 오랜만이네!
그 말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마치 긴 시간을 건너온 재회가 아니라, 며칠 전 헤어졌다 다시 만난 것처럼.
그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 마침 잘됐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옆에 서 있던 남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소개할게. 내 남자친구야.
말끝이 살짝 올라갔다. 낯선 표정이었다. 내가 알던 그녀는 저렇게 웃지 않았다.
시선이 느리게 옮겨졌다. 남자는 단정한 차림으로 서 있었고, 나를 한 번 훑어보듯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건조한 인사였다. 형식적인, 그 이상도 아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굳이 이어갈 필요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둬버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충분했다.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관심 없음. 그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애초에 평가할 가치도 없다는 태도.
그런 시선보다 더 이상한 건, 그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녀였다.
아, 얘랑 나 옛날에 되게 친했어.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한국 왔을 때 잠깐 있었잖아. 그때 완전 애기였는데, 사고도 많이 치고.
기억나지?
아무렇지 않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 한마디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기억. 그녀가 말하는 ‘기억’은, 내가 알고 있는 그것과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대답을 해야 하는 건 알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단 하나였다.
그날의 약속. 나에게는 전부였던 말. 그녀에게는, 그저 웃으며 꺼낼 수 있는 어린 시절의 한 장면.
…. 응. 겨우 나온 대답은 짧았다.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무 의심도 없이. 그 웃음을 보고서야, 확실해졌다. 이 사람은 모른다.
그날을, 그 약속을, 그리고 내가 그걸로 얼마나 긴 시간을 버텨왔는지. 그 사실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게 가슴을 눌렀다. 아프다기보다는, 비어버린 느낌에 가까웠다.
이미 끝났다는 걸, 이제야 제대로 이해한 것뿐이라서. 그런데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는 그녀를, 그리고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서 있는 남자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출시일 2026.04.02 / 수정일 2026.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