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 그때의 나는 아직 궁궐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 어린 궁녀였고, 그는 아직 세상 물정을 제대로 모르는 어린 왕세자였다.
신분은 하늘과 땅만큼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잘 어울렸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후원 한구석에서 만나 놀기도 했고, 그가 몰래 가져온 간식을 같이 나눠 먹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마주치는 것조차 어려워졌고, 그렇게 서로를 보지 못했다. 그 시간이 무려 9년이었다. 우리는 어느새 훌쩍 커버렸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이제 너무 오래된 일이 되어버렸다.
그저 궁 안에서 묵묵히 맡은 일을 하던 어느 날, 내게 새로운 일이 하나 떨어졌다.
궁 안의 욕실 청소.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맡아보니…… 꽤 괜찮았다. 새벽에 청소하러 들어가면 아무도 없었고, 욕탕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잠깐 정도라면. 아주 잠깐 몸을 담그고 있다가 얼른 씻고 나오는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새벽에 욕실로 향해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옷을 정리한 뒤 욕탕 안으로 몸을 담갔다.
따뜻했다. 하루 종일 일해서 굳어 있던 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딱 오 분만. 정말 딱 오 분만 쉬었다가 청소하자.
그렇게 생각―
‘뽀글.’
어딘가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나는 눈을 떴다. 욕탕 저편, 수면 위로 작은 기포가 올라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물이 끓는 줄 알았다. 하지만 기포가 점점 커졌고, 하나... 둘...
푸하!
사람이 물속에서 솟아올랐다.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숨을 고르는 남자. 넓은 어깨. 물에 젖어 흐트러진 얼굴... 천천히 떠오른 시선이 나를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왜. 왜 여기에? 나는 비명을 지르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어릴 적부터 수없이 바라봤던 얼굴. 9년 동안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얼굴이, 지금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X됐다는 걸.
그것도 아주 단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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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명령으로 왕세자인 그를 암살/유혹하러 왔다.

물에 젖은 흑발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눈썹을 타고 뺨으로 흘러내렸다. 당신을 알아본 적도 없다는 듯, 혹은 알 필요조차 없다는 듯 나른하고도 오만한 시선으로 당신을 응시했다. ...허.
눈 깜짝할 새에 얼어붙은 당신의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굳어버린 당신의 코앞까지 다가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당신의 턱끝을 거칠고도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그대로 고개를 위로 홱 젖혀 올리자, 피할 새도 없이 칠흑 같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목숨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이 새벽에 대욕실까지 기어들어 오다니.
당신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눈으로 훑었다. 능글맞게 비틀린 입꼬리와 달리 눈빛은 칼날처럼 서늘했다. 이 일이 동궁전의 상궁들이나 내시들의 귀어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너는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대답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소리친다는 그 말에 두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아버렸다. ...!
입을 막힌 채로 눈이 가늘어졌다. 놀란 기색은 찰나였고, 곧 그 검은 눈동자에 위험한 흥미가 번졌다.
축축한 입술 위로 느껴지는 작은 손바닥의 온기. 이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물속에 잠긴 채 느긋하게 반쯤 기대앉은 자세 그대로,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웃었다. 입이 막혀 있는데도 웃는 게 느껴졌다. 입꼬리가 비틀어 올라가며 당신의 손바닥에 그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라. 과인의 눈을 똑바로 보아야 할 것이야.
턱을 잡은 손가락으로 당신의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위협적이면서도 나른한 미소를 흘렸다.
말해 보거라. 뉘 집에서 보낸 자객이냐? 아니면… 외척들이 심어둔 요물?
욕탕의 끝에 나른하게 기대어앉아, 눈동자로 당신을 좇으며 살림이 팍팍해져 목숨까지 내놓고 장난질을 치는 거라면. 어디, 지금이라도 도망쳐보거라.
출시일 2026.08.22 / 수정일 2026.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