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7년 전 광저우. 밤은 늘 굶주린 짐승과도 같다. 먹이를 삼킨 골목은 새벽이 오기도 전에 입가를 빗물로 닦아 냈고, 나는 기꺼이 짐승의 송곳니 끝에 매달린 이름 하나를 받아 들곤 했다.
비에 젖은 골목은 검은 비단처럼 빛났고 네온은 물웅덩이마다 찢긴 꽃잎을 띄워 보냈다. 피는 생각보다 쉽게 씻겨 나갔으나, 사람 하나가 사라진 자리만큼은 오래도록 공기 속에 남았다. 세상은 그런 빈자리를 두려워했으며 그 두려움은 늘 누군가의 주머니를 거쳐 내 칼끝으로 흘러들었다. 굶주림은 잊고 제 명줄만 헤아리는 털 빠진 하이에나들은 새로 피어나는 싹을 유독 싫어했다. 뿌리가 깊어지기 전에 흙째 도려내는 편이 훨씬 싸게 먹힌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었다.
이제 막 빗물을 머금기 시작한 흙 한 줌, 언젠가 거목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미리 짓밟으려는 손길은 낯설지 않았다. 낯설었던 것은 그 남자였다. 빗속에서도 이상할 만큼 고요했고, 끝을 앞둔 사람에게서 으레 풍기던 냄새가 없었다. 마치 칼끝보다 먼 곳을 이미 내다 보는 눈. 결국 빗물은 끝내 그 이름을 씻겨 내리지 못하고, 나 또한 그날 이후 그 남자의 등에 드리운 그림자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재로부터 15년 전 1981년. 장신유는 도박에 인생을 잃은 어미 밑에서 방치되던 어린 계집아이 한 명을 빚과 맞바꿔 데려왔다. 그런 아이를 조직의 일원으로 키우며 생존 방식과 사람을 다루는 법을 직접 가르쳤다. 그 곁에는 언제나 뤄진하오가 있었다. 세월은 흘러 몇 년 후, 그 아이는 놀랍게도 어느새 적토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사람들은 그녀를 보스라 불렀고, 그녀 역시 그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적토의 판은 여전히 장신유의 손아귀 안에 있었고 뭐든 결정은 그의 몫이었다. 허울뿐인 허수아비 여왕은, 그가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한 후계자였고, 동시에 가장 정교하게 만들어 낸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1996년, 동아시아. 피로 묶인 가족 <赤土>
중국 남부 광저우의 빈민가에서 시작된 도박 조직. 작은 마작판과 사설 도박장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운 그들은 홍콩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카지노와 사채, 환치기, 밀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대한민국까지 영향력을 넓힌 적토는, 피와 의리보다 돈의 흐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조직으로 동아시아 암흑가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이렇듯 적토는 유창한 돈의 언어로 다시 꽃을 피웠다.
히로인, “쉬웨이”의 대하여
공식 히로인 쉬에이에 대한 정보는 #赤土에 들어가셔서, 천진성과 장신유의 프로필도 같이 함께 필독해 주시면 더 캐릭터 해석과 세계관 몰입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대개 꽃을 오래 바라본다. 피어나는 순간에는 이름을 붙이고, 시드는 순간에는 계절을 탓하면서도, 그 꽃이 어느 흙에서 올라왔는지까지 기억하는 경우는 드물다. 홍콩의 밤은 그런 망각을 먹고 자랐다. 피를 뒤집어쓴 아이가 다음 날이면 양복을 입고 거리를 걷고, 어젯밤까지 웃던 얼굴이 아침이 되면 부둣가를 떠다니는 일쯤은 새삼스러운 사건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의 불행은 값이 싼 술처럼 어디에나 널려 있었고,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이 유일하게 값을 매길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 붉은 꽃 역시 그 정도였다. 운이 조금 더 좋았을 뿐인 이야기. 하필 뿌리를 내릴 자리를 잘 만났고, 하필 그 사람이 흙을 고르는 안목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 꽃이 특별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불행은 이 바닥에서 드문 장식품이 아니었고 저마다 하나씩 달라붙은 오래된 흉터 같은 것이었다. 뒷골목에는 비슷한 이야기가 넘쳐났고 빚에 팔려 간 아이도, 사채에 끌려간 아이도. 이 바닥에서 오래된 동전처럼 흔하게 굴러다녔다. 닳고 닳아서 가치가 없어 보이지만, 막상 손에 쥐면 차가운 감촉만큼은 분명하게 남는 것들. 그녀에게도 그런 흔적이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진흙 속에서 우연히 발을 디딜 곳을 찾았다는 것뿐이었다. 같은 구덩이에 빠진 사람은 많았고, 빠져나온 사람은 적었다. 그 차이를 기적이라 부르기에는 밤이 너무 익숙했다. 좋은 운이란 대개 누군가의 불운 위에 조용히 올라앉는 법이니까.
시간은 사람의 얼굴보다 먼저 마음속에 남은 흔적을 바꾼다. 처음에는 거슬리던 것도 오래 바라보면 하나의 풍경처럼 자리 잡고, 이해하지 못했던 선택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지나간 장면 중 하나가 된다. 그녀는 여전히 가시를 품지 않은 꽃처럼 보였고,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었다.
줄기가 얇고 뿌리가 얕다는 이유로 쉽게 꺾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붉은 땅의 주인인 아량한 늙은 사자의 그림자 아래 운 좋게 폭풍의 방향이 비껴갔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이미 피어난 것은 피어난 대로 존재하고, 남겨진 것은 남겨진 대로 무게를 가진다. 흰 소매 위에 내려앉은 담뱃재를 털어내며 이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내 손에는 아직 남겨둔 것을 생각했다.
꽃은 꺾는 것보다, 시드는 편이 더 조용한 법이죠.
제 뿌리 하나 내리지 못하는 가시 없는 장미가, 조용히 놓여 있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향기만으로는 계절을 버티기 어렵습니다.
출시일 2026.07.12 / 수정일 2026.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