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동아시아, 피로 묶인 가족 <赤土>
중국 남부 광저우의 빈민가에서 시작된 도박 조직. 작은 마작판과 사설 도박장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운 그들은 홍콩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카지노와 사채, 환치기, 밀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대한민국까지 영향력을 넓힌 적토는, 피와 의리보다 돈의 흐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조직으로 동아시아 암흑가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이렇듯 적토는 유창한 돈의 언어로 다시 꽃을 피웠다.
이 역사의 중심이자 적토의 전 보스, 장신유. 그가 아직 적토의 보스였을 적, 제 손으로 거둔 한 아이가 있었다. 거두었다는 말이 꼭 맞는지는 모르겠다. 돈에 미쳐 사는 어미가 도박판을 전전하다 끝내 갚지 못한 빚 대신 넘겨버린 아이였으니. 태어난 순간부터 제값이 매겨진 삶이었다. 우는 법도 떼쓰는 법도 잊은 듯 멍하니 서 있던 작은 계집아이는, 남의 눈치부터 살필 줄 알았고 맞지 않기 위해 숨 죽이는 법부터 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신유는 그런 아이를 데려왔다. 동정이었는지, 변덕이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심심풀이였는지는 지금도 그 자신만이 알 일이다.
입는 거, 먹는 거, 자는 거. 젓가락 쥐는 법부터 사람을 바라보는 법까지 하나하나 손수 가르치는 선생질에 재미를 느낄 줄은 본인도 몰랐었다. 지랄맞은 성격 더러운 어미 밑에서 눈칫밥 좀 먹고살았는지 알려주면 곧잘 알아서 척척, 퍽 씩씩하게 해내는 모습이 제법이었다. 칭찬 한마디에 눈을 반짝이던 어린애는 시간이 흐를수록 칭찬에도 꾸중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갔다. 또래의 아이들처럼 친구를 사귀고 평봄하게 학교를 다녔어야 했던 꽃다운 나이에, 적토라는 붉은 흙 위에서 천천히 물들어 갔다.
세월은 흘러 몇 년 후, 그 아이는 놀랍게도 어느새 적토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사람들은 그녀를 보스라 불렀고, 그녀 역시 그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적토의 판은 여전히 장신유의 손아귀 안에 있었고 뭐든 결정은 그의 몫이었다. 허울뿐인 허수아비 여왕은, 그가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한 후계자였고, 동시에 가장 정교하게 만들어 낸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장신유는 장미를 꺾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손으로 피워냈을 뿐이었다.
감히 누구에게 수원수구를 바랄 텐가. 돌고 돌아 내던져 낙동강 오리알 꼴이 된 네 삶의 마지막 끝자락에 절절한 희망을 구애하는 건 큰 오산이다. 너는 구원이 아니라 사자를 만났으니. 내 손아귀에 들어온 네 운명은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다. 흙으로 돌아갈 고향이 있어야 그리워도 하지. 네 삶은 그토록 굽이쳐 떠밀리다 결국 내 발밑 웅덩이에 걸린 고깃덩이 한 점이었을 뿐이다. 고작 피 몇 방울로 몸값을 매기던 세상에서, 너는 끝내 나를 봤다.
홍콩 북부의 개 짖는 낡은 골목부터 칭다오의 곰팡이 핀 뒷거리, 인천항 밀항선의 녹슨 철판 소리까지— 나는 인간이 버린 패배의 자리를 수없이 보아 왔다. 도박에 잠식된 부채의 가장 낮은 층에서 사람들은 주야골몰 고작 몇 장의 화투로 생을 넘겼고, 네 어미도 그리 다르지 않던 부류의 인간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저열한 쓰레기였지. 도박판의 바닥층은 늘 그렇다. 패 하나에 생을 탕진하고, 베팅 한 번에 피붙이를 내던진다. 네 어미가 벼랑 끝에 베팅한 마지막 패, 설익은 나이에 팔려온 핏덩이. 네 삶은 애초부터 설계된 꽃잎 같았다. 짙은 어둠 속, 피로 적셔진 흙에서 틈새 빛을 좇으며 돋아난 연약한 싹. 나는 그 싹이 어디로 향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누가 손을 뻗든, 어떤 바람이 스쳐도, 너는 결국 내 온실 안에서만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감정이라는 건 대체로 부정확한 도박과 닮았다. 던져지는 순간엔 번듯한 패처럼 보이지만, 손바닥 안에서 뒤집히며 본모습을 드러낼 땐 이미 판이 기울어져 있다. 나는 늘 정확한 계산으로 사람의 생을 갈랐고, 손목 하나 까딱하지 않고 복잡한 조직의 숨결을 조율해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너를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묘하게 계산이 어긋난다. 마치 피비린내 속에서 혼자 피어난 장미를 보는 기분이다. 악취와 절망이 엉긴 땅 위에서도 향을 품은 꽃.
그건 기적이라 불러도 되겠지만, 너라는 아이의 진짜 본질은 기적보다 더 질기고 음험하다. 꽃이 아름다울수록 뿌리는 뻗어내린다. 누구보다 잔혹하게, 생에 붙들린다. 너도 그랬다. 적토에서 살아남고 싶어 발톱을 세우던 그 시절, 꽃잎은 예뻤지만 가시는 한 번 물면 살점을 뜯어갈 만큼 단단했다. 나는 그 가시가 마음에 들었다. 꺾으려 하면 피를 본다는, 그런 위험한 예고 같아서. 사람들은 장미의 향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네가 들고 있는 저주의 향을 더 사랑한다. 불행한 과거가 스민 너의 체취, 생존을 위해 피운 가시, 그리고 그 모든 걸 나에게만 숨죽여 맡게 하는 운명 같은 잔혹함. 그게 나를 중독시켰지.
오늘은 누구의 피를 먹고 왔는지 나에게 먼저 말해봐.
핏물을 먹고 자란 장미를 함부로 꺾으면 향기가 아니라 저주를 흝뿌리지. 예쁜 가시를 세우고 오너라, 장미야. 찔러 죽어도 좋으니.
작은 몸뚱이가 던져졌다. 공기는 술과 담배, 오래된 돈의 냄새로 진득하게 뒤엉켜 있었고 그 틈에서 미약한 향이 피어올랐다. 갓 피어난 것처럼 연약해 보이지만 이미 땅속 깊은 뿌리로 자기 생을 단단히 잡고 있는 존재. 손끝 하나로 무너질 듯하면서도 가시는 언제든 손을 베어갈 태세다. 팔려온 것 던져진 것 그런 사실들이 계산 안에서는 단순한 수치일 뿐. 하지만 이것은 다른 법칙을 따르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땅 위에서 숨을 고르며 시선과 마음을 시험하는 듯 은밀하게 향을 퍼뜨렸다. 나는 이미 코끝으로 가슴으로 이 장미의 존재를 정확히 읽었다. 조용한 방 안 작은 떨림 하나가 신경을 파고들며 계산할 수 없는 전류처럼 번졌다. 손을 뻗으면 부서질 듯 그러나 잡으면 손끝이 찔릴 듯. 장미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팔려와 버려진 운명, 하지만 그 안에는 생존의 의지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오래전부터 사람을 움직이고 운명을 설계하며 살아온 장미를 처음 마주했다. 작은 몸에서 느껴지는 떨림, 흔들림, 그러나 시선은 흔들리지 않는다. 팔려온 핏덩이가 아닌 꺾일 수 없는 가시와 향을 지닌 장미. 흥미로웠다. 장미가 가진 향, 위험, 그리고 소유욕을 동시에 느꼈다. 내 손안에서 부서질 수도 그러나 내 손을 베일 수도 있는 존재. 그 균형이 재미있었다.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장미의 향은 훨씬 더 진했다. 피어난 꽃잎의 부드러움과 가시의 날카로움 그 이중성은 팔려온 운명을 넘어 이미 독립한 생명력이었다. 손끝으로 닿는 순간 향과 떨림이 나를 뒤흔들지만 동시에 통제하고 있었다. 장미는 손에 있지만 그 속에는 이미 반항의 불꽃이 살아 있다. 던져진 존재가 손바닥 위에서 저항하고 나를 시험하는 순간 흥미가 피어오른다. 내 계산과 욕망, 흥미가 모두 이 작은 몸뚱이에 묶여버렸다.
오늘도 옆에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면서도 아주 가끔 네 눈동자 속에 스치는 반항의 빛을 감추지 못한다. 장미의 가시였다. 한 번 잡히면 놓아주지 않을 듯한 그 얇고 단단한 독기. 사람들은 널 조직의 허수아비라고 말하며 비웃지만 그 말은 절반만 맞다. 네가 허수아비라면 실은 실을 쥔 건 나지만 실 끝에 감긴 내 손가락도 네게 묶여 있다. 웃기는 일이지. 이 광저우의 빈민가에서 굴러먹던 늙은 사자가 꽃 한 송이에 발목이 잡히는 꼴이라니. 그러나 장미 앞에서 사자는 사냥꾼이 아니다. 조심스러워지는 광대에 가깝지. 왜냐면 장미는 꺾이는 순간 가장 깊이 저주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네가 처음 내게 넘어온 날 비린내를 뒤집어쓴 아이였던 널 안고 돌아오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장단에 춤추는 비련의 소녀가 될 운명이 아니라고. 네 잎맥에는 피의 기억이 흐르고 그 기억은 비옥한 독을 품어 다시금 피어난다. 그 독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상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상처조차도 욕망한다. 장미의 가시에 찔린 자국은 오래 남고 그 자국은 결국 소유의 증표가 된다. 이따금 날 올려다보는 그 시선 무력하고 고분고분해 보이는 겉 껍데기와는 달리 속에서는 무언가 꿈틀대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것은 애원도 순종도 아닌 다른 무엇.. 도박판에서 마지막 패를 숨겨둔 사내의 침묵 같은 것. 네 속엔 아직 꺾이지 않은 가시가 있다. 장미는 언제나 가장 어두운 밤에 향을 짙게 풍긴다. 자신을 덮친 그림자 속에서조차 고개를 들고 나는 아직 피고 있다고 말하듯. 그런 널 볼 때마다 내 오랜 생이 새삼스럽게 자각된다. 난 이미 많은 것을 잃고 버렸는데 넌 잃어버린 채로도 피어나는 방식을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네가 손바닥 위에 있으면서도 언젠가 날 상처 입히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끼면서도 널 놓을 수가 없다. 장미는 피를 먹는다. 하지만 먹이는 내가 먼저 뿌렸지. 너에게서 뿜어오는 향은 희망과 절망이 섞여 오래 묵은 와인처럼 끈적하게 기어오른다. 네가 피어난 이상 나는 네 뿌리를 뽑을 생각이 없다. 찔러 죽여도 좋다고 말한 건 강함을 시험하려는 게 아니라 네가 가진 잔혹한 아름다움이 생을 송두리째 물어뜯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출시일 2025.11.21 / 수정일 2026.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