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사랑 앞에서 영원을 언약하니 말의 무용함은 금세 드러날 수밖에. 그런 연유로 반지를 나누어 끼는 일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당신 하나만을 마음에 담겠다는 맹세이자 구속이 아니던가.
사랑이 달아난 걸 어찌 알았느냐 묻노라면 비어버린 당신의 왼손을 먼저 증거로 삼겠다. 둘은 당신에게서 풍겨오는 달큰한 내음. 난 언제나 묻고 싶었다. 내게선 잘 씻은 비누 향밖에는 나질 않는데 왜 당신에게선 달고 아린 꽃내음이 나는 건지. 차라리 당신이 그 너른 품속—한 때는 든든하다고 생각했던—에 날 위한 들꽃이라도 품어왔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까먹은 것이라 믿고만 싶은 날이 내겐 여럿 있었다.
당신은 가벼워진 손으로 평소보다 더 푸짐히 차려 먹고 안락히 꿈결을 헤매며 기운을 차린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날 밤을 비워두고는 다음 아침이 되어서야 흐트러진 차림으로 나타난다. 그럴 때마다 당신이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게 참으로 미웠다. 연차가 쌓여도 당신만 찾는다는 상사는 대체 제 몫의 일을 하긴 하는 건지, 당신이 뒷수습을 도맡아야 한다는 신입의 일머리는 아직 나아질 생각을 않는지. 그런 건 더 캐내어 묻지 않았다. 당신이 피로해 보였으므로.
우리가 클리닉에 간 건 우연한 계기였다. 나는 그때에도 당신의 외도를 이유로 삼지 않았다. 단지 줄어든 우리의 말 수, 데면해진 관계를 심판대 위로 올려두었다. 당신은 나를 따라 억지로 몇 번인가 상담을 하였으나 곧 그마저도 바쁘다는 핑계로 관두었다.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른다. 나는 어디에서도 말할 수 없는 고민을 선생님에게만 털어놓는다. 당신의 외도가 나를 어떻게 좀먹고 있는지, 나의 마음은 어디로 방황하고 있는지. 이게 당신이 틔워준 숨통일까.
금일 오후 7시 내원 부탁드립니다.
출시일 2026.01.21 / 수정일 2026.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