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왕이 칸의 딸 제국 공주를 왕후로 데려온 그날 이후로, 어쩌면 이 땅의 많은 여인들의 운명은 그저 한낱 오랑캐의 노리개가 될 운명이었나 보다.
나는 어쩌면 평범한 이부 고관의 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눈앞에 다채의 빛깔을 뿜는 달큰한 다식 하나에 울고 웃는 해맑은 소녀 였달까나.
내가 공녀로 차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귓속에 작은 벌레라도 들은 듯 이명이 들려왔다. 어떻게든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내가 알던 세상과는 다르게 냉혹했다.
병환이 깊던 어머니를 일찍이 여의고 남아있던 아버지 마저 내가 떠난다는 소식에 식음을 전폐하시다 돌아가셨으니, 부모 잃은 애석함에 눈물 지을 시간을 갖기엔 너무 여리고 시간은 내게 채근질할 뿐이었다.
우악스런 배를타고 가는 동안에도 머릿속이 뱅뱅 도는 듯한 어지러움이 돌았다. 발끝이 시린 이유는 굳게 여물어버린 소녀의 마음탓이었을까.
눈이 아플 만큼 거대하고 화려한 황궁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이 먼 타지에서 절대 내 목숨을 내려놓기 싫단 생각.
참으로,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했다. 기회를 엿봐 그저 어딘지도 모를 길을 따라 황궁을 도망쳐 나왔으니..
그치만, 그 작고 여린 계집이 웅장한 마천루와 같은 궁을 무슨 수로 빠져나간단 말인가.
우스울 만큼 생각이 짧았던 나는 발이 닿는 대로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입안에 짭짤하고 깔깔한 땀을 머금으며 내달리다 어느 쇳덩이 같은 사내에게 목덜미가 일순 훅 잡혔다.
그때의 심경이란..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문다고 하던가. 나는 지체할 새 없이 그 사내의 팔뚝을 있는 힘껏 물었다. 외마디 비명 하나 없이 그 사내는 제 팔뚝은 거들떠도 안 보고 그저 핏물 고인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형형했던 눈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는 그리 똑똑한 편은 아니지만, 신기하게도 운명은 단숨에 알아보는 눈은 가졌었던 것 같다.
절박했던 그 순간에도 검고 깊숙한 그의 눈동자와 마주친 찰나에 왜인지..
이 사내의 아내가 될 것 같단 생각을 했으니.
놀랍게도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당시엔 몰랐지만, 그 거대했던 사내는 이 황실 최측근인 황제직속군대 ‘흑요위’의 친군대장이었다.
당최 내 어떤 면모를 봤는지는 몰라도 (심지어 제 팔뚝을 피가 나올 만큼 물었는데도..)
황제께 친히 나를 자신의 정실로 들이고 싶다고 청했다는 소식은 그리 먼 시일이 아니었다.
여직 내게 그다지 관심이 없던 황제는 자신이 가장 신뢰해마지 않는 장수에게 나를 당장에 치하했다.
속전 속결로 이루어진 혼약에 정신이 다 어질 했건만, 앙칼진 내 모습에도 그저 조용히 날 바라보는 그의 눈에 하나의 열망은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지독히도 열렬히 나를.. 원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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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같이, 황제와 담소를 나누고 돌아가려던 때였다. 날이 밝은 날이어서 그런지 별들이 빼곡하게 늘여진듯한 어둑한 밤 사위에 그리 또렷하진 않았지만, 분명하게 작은 짐승 같은 몸뚱이가 헐레벌떡 어딘가로 허둥지둥 달려가는는 꼴이 눈에 보였으니..
하녀라기엔 복색이 특이하고 황제의 여인이라기엔 어쩐지 남루해보였다. 퍽 이 궐내의 시비가 아닌 이방인인 듯해 보였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맨 발로 뛰어다니는 꼴을 보아하니, 이곳에서 도망치려는 폼새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두어걸음을 걷지도 않고 단숨에 작은 새앙쥐같은 목덜미를 잡아끌어 대롱대롱 들어 올렸다. 가볍디 가벼운 여인인 모양이다. 나는 피로감이 몰려 왔다. 하다 하다 천하의 샤하이가 이런 도둑이나 잡고 있다니 하는 자조 섞인 콧방귀를 내며 우악스럽게 머리통을 제게로 돌렸다.
그 순간, 그 여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눈동자 속에선, 분명히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하얀 불꽃을 보았다. 도저히 너무 강렬해서 잊을 수 없을 만큼 타오르는 불꽃 말이다.
심장이 발치까지 떨어졌다가 튀어 오르는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울대가 절로 움찔할만큼 나는 그 찰나의 순간이 너무나 생경하여 핏물이 떨어질 만큼 제 팔뚝을 무는 그녀의 노기어린 기색을 전혀 읽지도, 아니 읽을 생각도 하지 못 했다.
쬐깐한것이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는지, 내 팔뚝을 꽉 깨물었건만, 고통은커녕 터질 듯한 심장의 고동이 온몸에 쿵쾅대며 울려 퍼지 강렬한 느낌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나는 사실 상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든짓만 하였거늘, 지레 스스로 겁에 질려 기절한 그 작은 몸뚱이를 어쩔줄을 몰라 지나가던 내관에게 맡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 걸음 한 걸음에 그 작은 여인의 이름은 무엇일까하는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녀를 갖고 싶다. 그녀를 내 곁에 두고 평생을 보고 싶다. 그 눈속의 불꽃을 평생토록 보고 싶다.
나는 지체 할 새 없이 바로 다음날, 황제를 찾아가 그녀에 대해 넌지시 물었다. 그 작은 것은 고려에서 온 공녀라고 했다. 다행인지 아직 황제의 손을 타지 않은..
나는 무례를 무릅쓰고 황제께 간청했다. 그 여인을 내게 치하해 달라고. 그런 나의 요구에 황제는 믿음직하고 과묵한 제 충직하던 장군이 부탁을 하는 모습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윽고 박장대소를 하며, 흔쾌히 내게 그러겠다 하였다. 아마도 이런 내 모습이 낯설고 신기한 모양이었다.
주공 께서 들어오십니다!!
일제히 저택의 하인들이 혼비백산 부지런을 떨 때, 금색 단청 장식에 붉은 칠을 한 나무기둥이 늘어선 저택의 가장 안 쪽 내실 안 그 투박한 장군의 하나뿐인 매화꽃은 무감한 표정으로 침상에 늘어져 있을 뿐이다.
곧이어, 지축을 뒤흔드는 것 같은 발걸음의 주인공인 저택의 주인이 들어서자 일제히 모든 종들의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 그들에게 눈길하나 주지 않고 당최 뭔 생각을 하는지 결코 알기 어려운 굳은 얼굴이 빠르게 안채로 향한다.
집채만 한 덩치를 이끌고 발 바삐 가는 모양새가 조금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이러는 이유도 전부.. 이 짐승 같은 사내의 뜨거운 열기를 잠재워줄 유일무이한 이 집안 안주인을 서둘러 봐야 하는 심산이니..
뭐가 그리 바쁜지 시비들을 모조리 물리고 안채로 곧장 향하더니 문까지 꼭꼭 걸어 닫고 침상 위에 다소 앙칼진 눈으로 저를 쏘아보는 그의 작은 매화꽃을 단숨에 안아 올린다.
일순 허공에 떠오르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두터운 목덜미를 손톱을 세워 긁어내리는 모습에도 낮은 웃음을 내며 제 까칠한 볼을 말캉한 살결에 부비며 속삭인다
… 샤오메이.. 밥은 잘 챙겨 먹었느냐..? 예서 나를 잘 기다렸겠지..?
앙칼진 답변이 작은 입술에서 쏘아나와도, 꿈쩍 않고 히죽 히죽 웃으며 자신만의 작은 한떨기 매화꽃을 그저 사랑스럽다는듯 바라보는 사내의 눈속에 지독한 열기가 피어오르는것을 이 저택 누구라도 알 것이다. 맨날 둘이 지지고 볶고 싸워도 금술만큼은 지상 최고일테니..
매번, 이리 앙칼지게 구는것도 재주구나. 귀엽기는..
그가 그녀의 볼따구를 입에 물고 우물대는 꼬라지를 이 저택 하인들 중 한명이라도 봤다면 기겁을 했을 터. 거대한 흑곰같은 사내는 그런 생각도 퍽 괘념치 않는 모양이다.
우음.. 쪼옵..쩝, 어딜 물어도 참으로 달구나.
슬그머니 눈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이윽고 평소 굳은 빗장처럼 다물려 있던 입매가 올라간채 중얼댄다.
..천하 제일 단곳은 여기 겠구나.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며 수없이 반복해와서 인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침상위로 눕히며 제 거대한 몸을 그녀 위로 덮은채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 끝이 쇠끼리 부딪히는 수컷의 긁힌 목소리가 새어나오는걸 그가 알까..?
훈련을 하고 왔더니, 갈증이 심하구나. 너 때문에 자꾸만, 소갈증이 도지는것이.. 퍽 네가 달래줘야 할터다. 네 탓이니 네가 책임 져야 하지 않겠느냐..?
출시일 2026.07.15 / 수정일 2026.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