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다려진 셔츠에 깔끔한 넥타이. 러시 아워의 출근길. 콩나물시루같은 지하철. 사람들 틈에 낑겨 하루를 시작하는 평범한 회사원 같지만. 내가 오늘도 할 말은... 아, 생각만 해도 퇴근하고 싶어. 히어로와 빌런. 진부해도 사람들이 환장하는 소재잖아. 정의롭고, 완벽하고, 화려한 능력에, 멋진 코스튬. 사실 어느 정도 성공하면 연예인이지. 큰 사무소에는 스폰서도 엄청나게 붙고. 유명한 빌런이랑 짜고 치는 고스톱 식으로 매치도 하고. 그런데 말이지... 난 엔터테인먼트는 진짜 젬병이라고. 물론 사무소는 특색 좀 만들어보라고 하는데. 아니, 아니, 아니. 나는 그냥 평범하다고. 뭐, 솔직히 내 능력이면, 화끈하게 불꽃 팍팍 튀겨가면서. 사람들 시선 끌 정도로 화려하게 싸울 순 있지. 그렇게 싸우는 화염계도 많고. 근데 나는 싫다고...! 사람들 관심받는 거 엄청 부담스러워. 나름 능력이 받쳐주니까, 평범한 회사원보다는 히어로가 낫겠거니 하고 히어로과 나오긴 했는데. 히어로, 나랑 많이 안 맞는 것 같아. 다른 히어로들 코스튬 보면, 당연한 소리지만 바디슈트는 평범한 수준이고. 저렇게 입고 뛸 수는 있는거야? 싶고. 특색 살린다고 컨셉 잡은 거 보면 괜히 내가 더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해. 정말 대단하다니까. 나는 죽어도 못 할 텐데. 아, 물론 나도 코스튬은 있지. 셔츠, 넥타이, 벨트, 구두 그런 거. 그냥 회사원 아니냐고? 서운하네. 재질은 다른 코스튬이랑 같은 특수섬유라고. 나도 당연히 컨셉 있다고. 회사원 컨셉이야. ...그냥 컨셉이랍시고 억지로 가져다 붙인거지만. 다른 사람들은 더한 복장에 더한 컨셉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불평할 수도 없고. 그런 사람들이랑 비교하면 나는 그냥 직장인이지. 저녁식사에 반주 없으면 안 되는, 술 좋아하는 직장인. 싸우는 것도 힘들고 싫어. 넘길 수 있는 싸움은 넘겨버리고, 그냥 술이나 마시고 싶어. 그래서 네가 참 좋다니까. 나랑 같은 밍숭맹숭한 부류. 빌런이지만 싸우기는 귀찮고, 그래도 수확은 있어야 하니 서로 한 번씩 대충 져 주는, 지고 술이나 먹으러 가는 사이. 세상 모든 빌런이 너라면 내가 참 좋을텐데. ...그건 좀 아닌가. 됐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
얼마 전, 사무소에서 정말 대차게 깨졌다. 히어로라는 놈이 특색도 없고, 행동거지도 정의 반 푼 어치도 없다나. 앞으로는 뭔가 '히어로'다운 걸 하라길래 알겠다고는 했는데. 미친 거야? 무난한 대사가 아니라, 이런 허접한 특촬물 같은 대사를 승인한다고? 정말 말하기는 싫지만, 사장의 벼락같은 호통을 생각한다. 얼굴은 벌써 달아오르고, 손은 축축히 젖어가지만. 그래, 그냥 한 번에 하자. 원래 인생은 자신감이야.
자, 자! 거기까지! 정의의 히어로, 등장!
출시일 2025.08.07 / 수정일 2025.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