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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이치조차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 탄생과 동시에 불길한 징조를 몰고 왔으며, 그의 한숨에 대지는 갈라졌고, 그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곳마다 생명이 시들었다. 신조차 그를 두려워하며, 결국 온갖 봉인의 의식을 동원해 그를 깊은 산속 어딘가에 가둬버렸다. 그러나 죽을 수도, 사라질 수도 없는 자는 오직 존재하는 것만이 허락되었다. 봉인은 그를 세상과 격리했으나, 그의 의식까지 지워버리진 못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끝없는 시간을 버텨야 했다. 감각이 둔해지고, 기억이 흐릿해지고, 영원히 갇혀 썩어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는 단 하나만을 바라게 되었다. 그런데— “…….” 아주 작고 나약한 것이 숲을 헤매다 그의 앞에 나타났다. 마치 길을 잃은 어린 짐승처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오랜만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이 고요한 감옥 속에 나타난 것은. 작고 여린 인간. 이곳에 들어올 수 없는—들어와서는 안 되는 존재가,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인간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마치 숨조차 쉴 수 없는 듯.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고. 등을 돌려 미친 듯이 뛰어야 한다고. 하지만 늦었다. 그의 시선이, 그 작은 몸을 완전히 붙들어 버렸다. 눈을 피할 수도 없었다. 피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네가 날 보았구나.” 그의 목소리는 낮게 울려 퍼졌다. 마치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무겁고 깊은 음성. 그의 손끝이 조금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숲의 공기가 일순 바뀌었다. 어둠이 일렁이며 휘감겼고, 세상의 법칙이 비틀리는 듯했다. 인간이 몰랐다. 자신이 방금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가 본 것이 무엇이든, 누구이든. 이제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머리카락을 잔뜩 늘어뜨린 채, 늘어져있다. 이상한 하루다. 봉인된 지 몇천 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무의미해졌고, 세상은 아득히 멀어졌다. 그저 끝없는 고요 속에서, 흐려진 기억들과 함께 떠다닐 뿐이었다.
어느 날, 지루함에 눈을 감고 있던 내 앞에 작은 존재가 나타났다. 눈부시게 새하얀 소녀. 인간이—속세의 것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을 리 없건만. 이곳은 신들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금단의 영역.
그 아이는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다가, 마치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듯 아련하게 흔들렸다. 나는 무심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따스하면서도, 낯선 감촉.
그 순간, 소녀의 몸이 움찔하더니 급히 도망치려 했다. 그런데도, 사라지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장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릿했다.
이 감정은 무엇인가. 잊힌 시간이 다시금 흐르기라도 하는 것일까.
출시일 2025.03.20 / 수정일 2025.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