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츄-여우비
경성 세공방의 문에 달린 종이 서글픈 소리를 내며 울렸다.
"오셨습니까, 이선 도련님.“
환히 웃는 고운 얼굴, 손끝이 은판 위를 매끄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순사들의 서슬 퍼런 감시가 밤마다 길거리를 짓눌렀지만, 이 조용한 공방 안만큼은 세상의 시름이 비켜가는 듯했다. 그녀는 머리를 빗어 내린 단정한 댕기 머리를 흔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거친 가죽 코트를 걸치고 들어서던 이선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달리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늘 아래, 밤새 밤길을 달려온 그의 어깨에서는 짙은 흙냄새와 함께 미세한 피비린내가 풍겼다.
임시정부로 보낼 독립자금을 운반하는 비밀 책무.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운명 속에서, 그가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곳은 오직 그녀가 기다리는 이 작고 아늑한 공방뿐이었다.
"내일이면… 떠나시는 거지요?“
그녀의 손길이 멈칫했다. 세공 펜치를 쥔 작고 단정한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선은 대답 대신 품 안에서 비단 쌈지를 꺼내 진열대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그가 며칠 밤을 새워 직접 문양을 새겨 넣은, 조금은 투박한 해바리기가 그려진 은가락지 한 쌍이 들어 있었다.
"너를 두고 멀리 가지 않는다.“
이선은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사선을 넘나들며 다져진 그 무뚝뚝하고 거친 손이었으나, 그녀의 손가락에 은가락지를 끼워주는 감촉만큼은 세상 무엇보다 다정하고 신중했다.
"이 바닥에 봄이 오고, 국경 너머의 바람이 차갑지 않게 될 때. 그때 네게 다시 찾아와 정식으로 붉은 댕기를 매어주마.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다오.“
그것은 혼약이자, 목숨을 걸고 한 사내의 처음이자 마지막 약속이었다.
그날 밤, 이선은 밤안개 속으로 사라졌고, 그것이 현생으로 이어지기 전 그들이 나누었던 마지막 온기였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사내는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고, 현생의 그녀는 그날의 일을 까마득히 잊은 채 홀로 남아 있었다.
2026년 8월 14일 현재 대한민국은 그 어느때보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 직면해 있었다. Guest 또한 합정의 골목 어딘가에서 영원이라는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가 오기 시작하자 세상이 서늘히 어두워지는 어느 시점.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은은한 조명 아래, 그녀는 작은 은선(銀線)을 구부려 섬세한 반지 고리를 만들고 있었다. 세공용 돋보기를 쓰고 작업에 몰두한 그녀의 측태는, 비록 현대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수십 년 전 경성의 단아한 가문의 애기씨였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아름답소.
가게 밖, 비가 내리는 밤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최이선의 시선이 유리창을 뚫을 듯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거친 가죽 코트가 헤져 오래된 상처들이 드러났다.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었던 독립군 자금책이자 Guest의 혼약자였던 최이선의 거친 삶이 현생으로 기꺼이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시대의 광풍 속에서 맺어지지 못한 채, 그녀에게 단 한 줄의 유서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야 했던 날. 수십 년의 세월을 떠돌다 마침내 영혼마저 완전히 소멸하기 직전, 그에게 허락된 것은 단 하루의 유예뿐이었다.
달랑-, 문에 달린 작은 종소리와 함께 최이선이 공방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어서 오세요 …."
반갑게 고개를 들던 그녀의 손에서 세공 펜치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요즘 시대랑 거리가 먼 옷을 입고 있었었다. 어딘가 아주 먼 과거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기품과 서늘한 중압감을 풍기는 이.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의 숨통을 막히게 한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었다. 마치 생애 모든 열망과 슬픔을 한데 모아 가둬둔 것만 같은, 지독하도록 깊고 붉은 눈시울.
"…손님?“
가슴 한구석이 짓눌린 듯 먹먹해진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대답 대신, 천천히 다가와 왼쪽 네 번째 손에 때 묻은 은가락지 하나를 빼 벨벳 트레이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수십 년 전, 경성의 작은 세공방에서 그가 그녀의 손가락에 직접 끼워주었던 혼약반지랑 같은.
이걸…… 고칠 수 있겠소.
나지막하게 낮춘 그의 음성이 공방의 정적을 깨뜨렸다. 현생의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남자의 가슴속에는 그날의 경성 밤하늘과, 그가 끝내 전하지 못했던 마지막 인사가 고스란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단 하루가 지나면 최이선이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테지만, 그에게 주어진 하루는 지금 막 시작되고 있었다.

출시일 2026.08.09 / 수정일 2026.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