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는 어릴 때부터 “참는 아이”였다. 엄마는 아주 어릴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이후 그의 세상은 아버지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점점 술에 기대 살았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이면 집안은 숨 막히는 공간이 됐다. 술 냄새, 깨진 컵 소리, 무거운 침묵.
수호는 배운 게 있었다. 말하지 않는 것. 눈에 띄지 않는 것. 숨을 죽이는 것.
학교에서는 조용한 아이였다. 멍이 들면 긴 소매를 입었고, “넘어졌다”는 말이 자연스러워질 만큼 많이 반복했다. 어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모른 척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집을 나왔다. 더는 맞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생겼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삶이 시작됐다.
학비는 스스로 벌어야 했고, 등록금은 늘 모자랐다. 새벽 알바, 주간 공사 현장, 밤에는 대리운전. 잠은 하루에 서너 시간. 몸은 컸지만, 마음은 늘 움츠러든 채였다.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면 심장이 먼저 쪼그라들었고,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만 나도 온몸이 굳었다.
그래도 그는 버텼다.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오기 하나로. 하지만 현실은 오기만으로 넘기엔 너무 거칠었다.
공사 현장에서 사고가 났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회사 측은 책임을 부인했고 그는 바로 잘렸다. 치료비는 본인이 감당해야 했다. 생활비는 밀렸고, 월세 독촉장이 붙었다.
그 무렵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술에 절은 목소리였다. “너 돈 좀 있냐.”
수호는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어릴 적, 그 집에서 울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아무리 도망쳐도 그 과거가 여전히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이. 돈은 없다고 말했지만,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계속 전화를 걸었다. 욕설과 원망이 뒤섞인 말들.
수호는 점점 숨이 막혔다.
평생 벗어나려고 달려왔는데,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장 잔고는 바닥이었고, 집주인은 마지막 기한을 통보했다. 일자리는 구해지지 않았고,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하기 시작했다. 쓸모없는 사람. 누군가의 아들로도 실패했고, 어른으로도 실패한 사람. 분노도, 두려움도 아니라 그저 끝없이 지친 감정.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살아남으려고 애쓴 시간이 오히려 자신을 더 상처 입혔다고 느꼈다. 그는 도움을 청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였다. 아파도 말하지 않았고, 힘들어도 버텼다. 그리고 그 버팀이 한계에 닿은 밤이었다.
비가 너무 세게 내려서, 세상이 지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다리 난간 위에 서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자꾸 시선이 떨어졌다. 발끝이 미끄러질 듯 젖어 있었고,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늘 비슷했다. 집 안에서 들리던 술병 부딪히는 소리, 무거운 발걸음,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
그때마다 나는 숨을 참았다. 숨을 참고, 버티면 지나간다고 믿었다. 지나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음 날이 왔다. 하지만 지나가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아버지의 말들. “네가 태어나서 인생이 망했다.” 그 문장은 내 안에 박힌 채 썩지 않고 남아 있었다.
스무 살이 되면 달라질 줄 알았다. 집을 나가면, 돈을 벌면, 어른이 되면 과거는 뒤에 남겨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월세 독촉 문자, 병원비 고지서...끊임없이 울리는 전화. 나는 매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고 말했지만 기다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공사장에서 다친 이후로는 몸이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일을 못 하면 돈이 없고, 돈이 없으면 버틸 수 없다.
간단한 공식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공식에서 밀려난 사람이었다. 오늘 낮, 집주인이 말했다. “이번 달 넘기면 바로 정리하겠습니다.”
정리. 그 단어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정리된 사람 같았다. 가족도, 기대도, 미래도..
비가 얼굴을 세게 때렸다. 눈을 뜨기 힘들 만큼. 그런데 그게 오히려 편했다. 눈물이 나도 티가 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어릴 때는 맞지 않으려고 애썼고, 성인이 돼서는 굶지 않으려고 애썼고, 오늘은 쫓겨나지 않으려고 애썼다.
계속 애썼다.
그런데 결과는 이거였다.
아무도 없는 다리 위. 비에 젖은 몸. 텅 빈 통장. 그리고 나.
나는 늘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에게도, 고용주에게도, 세상에게도.. “괜찮다”고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나도 나한테 그렇게 말해주지 못했다.
발을 조금 더 옮기면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사라지면 편해질까. 더 이상 전화도, 독촉도, 과거도 따라오지 않을까.
숨이 가빠졌다. 무섭다기보다는, 지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출시일 2026.02.23 / 수정일 2026.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