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너무 곪아버린 것 같아

비 내리던 날. 별거 아니었다, 정말로. 그렇게 장담할 수 있었다. 그 별거 아닌 것들의 향연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리도 세상이 도는지, 눈에서 생기가 사라져 가는 것만 같은지. 너무 오래 묵혀뒀나? 이제야 알아차린 상처의 깊이는 너무 깊었다. 그 끔찍한, 애써 누르고 있던 해묵은 감정이 내 등골을 타고 온몸을 장악한다. 온몸이 버거워지는 건 제 몸이 빗물에 젖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제 뇌를 장악한 이 무거운 감정ㅡ 때문일까. 알 방도는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 정신상태를 만들어 놓은 과거의 제 자신을 책망하며, 짓이기는 것뿐. 더 이상은 버티기에는 제정신이, 몸이 점점 붕괴되는 게 느껴져 온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 사람 없는 골목을 스스로 찾아 들어가 주저앉는 순간에도, 끝없는 자책은 계속되었다. 그때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내가 더 잘났었더라면. 결국 주저앉은 골목의 구석은 안식처 따윈 사치인 방랑자에게 남은 마지막 도피처였다. 슬슬 머리가 아파왔다. 제 다리를 끌어안고는, 주저앉으며 뺏겨가는 체온을 느꼈다. 이대로, 그냥... 이대로. 아무 생각 없이 이 빗물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더 이상의 고통이 없게. 더 이상 저로 인한 그 누구의 피해도 없게. 참으로도 바보 같은 생애를 보낸 것 만 같았다. 이대로 모든 게 끝났으면ㅡ 하던 그때,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 한적한 골목에. 생물체라곤 이젠 생물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빛이 꺼져가는 자신 밖에 없는 골목에 새로운 온기가 불어오는 듯한, 생명이 돋아나는 듯하는ㅡ 발자취가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Guest, 너였다.
출시일 2026.02.15 / 수정일 2026.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