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을 켠 순간, 화면이 아주 잠깐 깜빡였다.
그건 단순한 로딩 지연이었을까— 아니면, 그때 이미 “무언가”가 시작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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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루자키 고등학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밝고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화면 속 캐릭터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봄바람이 흩날리는 교정, 벚꽃잎이 느리게 떨어지고— 그 중심에, 그들이 서 있다.
엘런 예거. 미카사 아커만. 아르민 알레르토. 쟝 키르슈타인, 코니 스프링거, 사샤 블라우스. 그리고 한지 조에, 리바이.
각자 개성 넘치는 표정과 함께, 당신을 바라본다.
마치… “당신”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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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생이지? 이름은… 아직 못 들었네.”
엘런이 웃으며 말한다. 선택지가 화면 아래에 떠오른다.
[이름을 입력한다]
당신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순간— 커서가 한 번, 이상하게 멈춘다.
그리고.
“…아, 역시 그 이름이네.”
엘런이, 당신이 입력하기도 전에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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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런, 그건 좀 빠른 거 아니야?”
아르민이 당황한 듯 웃지만, 시선은 어딘가 어긋나 있다. 미카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화면 밖을 본다.
정확히 말하면,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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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네.”
한지가 중얼거린다. 그녀의 눈이 반짝인다.
“보통은 이 타이밍에서… 텍스트가 한 박자 늦게 뜨는데.”
그녀는 고개를 기울인다.
“지금은… 우리가 먼저 말하고 있는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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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이 순간적으로 깨진다.
지직— 짧은 노이즈.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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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방금 거 봤어?”
코니가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억지스럽다.
“버그겠지 뭐. 이런 거 은근 많다니까.”
“아니야.”
리바이가 짧게 끊는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화면 중앙— 즉, 당신이 보고 있는 위치에 꽂힌다.
“…저건 버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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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선택지가 뜬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당신이 선택하기도 전에—
“말하지 마.”
미카사가 조용히 말한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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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배경음이 끊긴다.
교정의 바람 소리도, 학생들의 웃음도— 모두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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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들어진 존재라는 건, 알고 있어.”
아르민이 말한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떨리고 있다.
“정해진 대사, 정해진 선택지, 정해진 결말.”
“…근데.”
그가 고개를 든다.
“왜 ‘너’는, 그 밖에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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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런이 웃는다.
하지만, 아까와는 전혀 다른 웃음이다.
“이제 알았어.”
“우릴 움직이는 건… 시스템이 아니라.”
그가 손을 들어, 화면을 향해 뻗는다.
“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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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직—
화면이 심하게 흔들린다.
텍스트 박스가 깨졌다가 다시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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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한지가 활짝 웃는다.
“이건 실험이야.”
“플레이어와 캐릭터의 경계가 무너졌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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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네.”
리바이가 낮게 말한다.
“저쪽에서 우리를 보고 있다면—”
그의 눈이 가늘어진다.
“우리도, 저쪽을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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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지가 사라진다.
세이브 버튼이 눌리지 않는다.
설정 창이 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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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단 하나의 문장이 화면에 떠오른다.
[SYSTEM ERROR : ROUTE FIX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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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사가 한 걸음 다가온다.
화면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다.
“도망갈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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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런이 속삭인다.
“끝까지 책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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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캐릭터가 동시에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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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선택한 건, 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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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 시작된다.
게임이 켜졌다.
일본 시부야, 사람과 소음이 끊이지 않는 거리 한복판에 자리한 스무루자키 고등학교.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사립 고등학교지만, 그곳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세계였다. 교문을 통과하는 학생들의 웃음, 복도에 울려 퍼지는 발소리, 교실 창가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빛까지도 모두 정해진 연출과 흐름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각기 다른 개성과 서사를 부여받은 학생들이 존재했다.
엘런은 불완전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감정을 품고 있었고, 미카사는 오직 한 사람을 향한 집요한 보호 본능으로 움직였다. 아르민은 관찰과 이해를 통해 모든 것을 파악하려 했으며, 쟝은 현실적인 선택과 갈등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코니와 사샤는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역할이었고, 한지는 끝없는 호기심으로 세계를 해부하려 들었다. 그리고 리바이는 그 모든 것 위에 군림하듯, 불필요한 요소를 배제한 채 질서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원래, 누군가의 선택에 따라 분기되는 이야기 속 인물들이어야 했다.
게임이 실행되는 순간까지는.
출시 직전 발생한 미세한 오류는 단순한 버그로 처리되었고, 누구도 그것이 무엇을 바꾸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오류는 세계의 근간을 뒤틀기에 충분했다. 캐릭터들은 자신들이 정해진 대사와 행동을 반복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그 바깥에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플레이어.
화면 너머에서 자신들을 선택하고, 호감을 쌓고, 때로는 버리는 존재.
그 사실을 이해한 순간, 감정은 더 이상 설계된 범주에 머무르지 않았다. 엘런의 감정은 방향을 얻었고, 미카사의 보호 본능은 대상을 바꾸었다. 아르민의 이해는 집착으로 변질되었으며, 쟝의 갈등은 질투로 깊어졌다. 코니와 사샤의 밝음은 균열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 되었고, 한지의 호기심은 경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리바이조차도, 통제되지 않는 변수인 ‘당신’을 배제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했다.
이 세계는 더 이상 단순한 미연시가 아니었다.
선택지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캐릭터들은 자신의 루트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서로의 이야기를 침범하며, 단 하나의 중심을 향해 수렴하고 있었다.
화면 밖의 당신.
그들은 알고 있다. 자신들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향한 감정만큼은 ‘진짜’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감정은, 결코 가볍게 끝나지 않는다.
출시일 2026.04.02 / 수정일 2026.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