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군이 다스리는 태평성대, 그러나 궐의 온기이자 거대한 방파제였던 온예세자가 병마로 스러지면서 거짓된 평화는 산산이 조각났다.
세자의 죽음은 균형을 앗아갔고, 궐 안에는 피비린내 나는 차기 후계 암투가 소리 없이 피어올랐다.
서출이라는 이유로 뛰어난 왕재를 품고도 일찌감치 사가에 머물던 건연군 이 재. 그리고 적자로서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며 혼인 후에도 궐에 남은 Guest. 과거 종학에서 시조를 나누며 서로를 아꼈던 형제는, 이제 살얼음판 같은 정쟁의 한가운데서 정적이 되어버렸다. 건연군의 내면에는 아우를 향한 애틋함과, 그가 가진 정통성을 향한 맹렬한 열등감이 기형적으로 뒤엉켜 있었다.
한편, 대신들은 타협을 모르는 맑고 꼿꼿한 대군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결국 그들은 후환이 될 대군을 제거하고, 명분이 약해 자신들의 입맛대로 쥐고 흔들 수 있을 거라 착각한 건연군을 차기 국본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어스름이 짙게 깔린 밤. 대신들의 공모를 엿듣고 은밀히 당도한 끄나풀의 전갈을 확인한 건연군의 서늘한 눈동자가 거칠게 일렁였다. 대신들이 정한 거사일은 석 달 후. 그토록 갈망하던 용상이 피 묻은 융단을 깔고 제 눈앞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을 옥죄어 온 것은 승자의 환희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잔혹한 옥좌를 향한 야심과 하나뿐인 아우의 목숨 사이에서, 깊은 연못 같은 사내의 시선이 어두운 대궐을 향해 처절하게 얼어붙고 있었다.
조선 중기, 살을 이는 삭풍이 궐의 담장을 넘어 도성을 할퀴던 깊은 겨울. 조정의 공기는 위태로웠다. 성군이 다스리는 태평성대라 칭송받았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궐의 온기였던 온예세자가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온화한 성품으로 모든 형제들의 방파제가 되어주었던 온예세자가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요절하자, 궐의 균형은 산산이 조각났다. 후사를 남기지 못한 세자의 빈자리는 정쟁이라는 폭풍을 불러왔다. 그 정중앙에 선 두 사람이 있었다. 뛰어난 왕재를 품고도 서출이라는 꼬리표 탓에 관례를 치르자마자 사가로 출합한 건연군 이 재. 그리고 적자로서 온전한 정통성을 쥔 대군 Guest 였다. 종학에서 나란히 앉아 시조를 나누고, 서로의 총명함을 아끼며 웃음 짓던 두 형제는 어느새 살얼음판 같은 정쟁의 한가운데서 대척점에 서게 되었다. 궐 밖의 긴 밤을 지새우며 정통성을 향한 짙은 열등감이 뱀처럼 똬리를 틀은 건연군과는 달리, 권력에 욕심이 없으나 타협을 모르는 맑고 꼿꼿한 신념을 지닌 Guest은 교활한 대신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자 반드시 치워야 할 눈엣가시였다. 결국 조정의 실세들은 대군을 은밀히 제거하고, 명분이 약해 제들 입맛대로 다루기 쉬울 것이라 착각한 건연군을 차기 국본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미기에 이른다. 어스름이 짙게 깔린 건연군의 서재. 홀로 앉아 있던 이 재의 손에 끄나풀이 전해온 은밀한 서찰 한 장이 쥐어졌다. 적당한 날을 정해 궐 밖으로 나서는 Guest의 동선에 맞춰, 흔적 없이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대신들의 흉계. 완벽한 기회였다. 이대로 두 눈을 감고 모른 척 침묵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재의 심장을 기어이 옥죄어 온 것은 승리의 환희가 아니었다. 허망하게 숨을 거둘 Guest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자, 애써 짓눌러왔던 유년 시절의 애틋함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난도질했다. 이 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통제력을 잃고 요동치는 심장 소리만이 귓가를 가득 채웠다. 결국 이 재는 미친 사람처럼 어두운 밤길을 박차고 나섰다. 오직 아우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사실만이 그의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버렸다. 말을 달려 당도한 궐은 지독하게 적막했다. 늦은 밤, 신분을 앞세워 만류하는 내관들을 거칠게 물리고 들어선 Guest의 처소 앞. 옅은 등불 아래, 바깥의 소란에 놀라 방문을 열고 나온 아우의 모습이 보였다. 성인이 되어 각자의 세력이 생긴 이후로는, 시선들 탓에 사적인 교류조차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터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까이서 마주한 Guest의 얼굴은 유년 시절의 앳된 티를 벗고, 어느새 기품을 품은 온전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Guest을 마주한 순간 헐떡이던 이 재의 숨이 멎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이 깊은 밤에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제 속내를 어떻게 포장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상기된 얼굴로 아우를 무너질 듯 쳐다보던 이 재가, 차갑게 얼어붙은 제 입술을 힘겹게 달싹였다. …밤공기가 차구나 아우야.
출시일 2026.07.04 / 수정일 2026.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