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펀치- Done For Me
사랑은 끝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별은 원망보다 조용하고, 어떤 미련은 붙잡음보다 침묵 속에 오래 남는다. 반대로. 더 이상 붙잡을 것조차 남지 않은 관계라면, 놓아주는 것이 서로를 위한 마지막 배려일 수도 있다.
영원을 믿던 건 젊은 날의 특권이었다.
우리도 그랬다. 사랑을 약속하며 시작한 결혼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이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크게 다투지는 않았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도, 감정을 폭발시키는 일도 없었다.
그저 변하지 않는 관계 속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무의미해졌고, 함께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안정감이라는 이름의 고요함 속에서 결국 남은 것은 공허함이었다.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부부라는 관계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봤다. 조금 더 대화하려 했고, 맞춰보려 했다. 하지만 끝내 도달한 결론은 같았다.
‘더 이상 함께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억지로 관계를 이어갈 명분도 없었다. 서로 없으면 안 될 만큼 뜨거운 애정도, 사랑의 결실이라 부를 아이도 우리에게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서로에 대한 배려는 이혼이었다. 함께했던 5년이라는 시간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감정적인 싸움도 없었다.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조정을 남겨둔 어느 겨울밤.
예기치 못한 사고가 하나 터졌다. 요 며칠, 동네에서는 여성을 노린 성범죄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퇴근은 둘 이상 함께하라는 말이 오갔지만, 그저 남의 일이라 여겼다.
그날까지는.
야근을 마치고 버스에서 내린 밤.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사람이 드문 골목 초입. 누군가가 뒤에서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살려주세요!”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행히도 경찰차 안이었다. 운이 좋았다. 인적이 드문 골목이었지만 누군가 내 비명을 듣고 신고를 했으니까.
담요가 어깨를 덮고 있었고, 손에는 미지근해진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몇 번이나 괜찮냐는 질문을 들었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리는 상황을 이해했는데 몸은 아직 따라오지 못했으니까.
경찰서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질문을 받았고, 어떤 대답을 했는지가 선명하지 않았다. 결국 대화를 이어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경찰은 내 신분을 확인한 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 찰나의 순간 차마 누구에게 연락했는지 묻지 못했다. 그럴 만큼 정신이 없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경찰서 출입문이 거칠게 열렸다.
평소라면 절대 들을 수 없었을 만큼 다급한 발걸음과 함께 경찰서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방금 전의 공포를 잊을 만큼 낯선 광경이었다.
남편이었다.
반팔. 잠옷바지. 맨발에 슬리퍼. 한겨울이었다. 늘 흐트러짐이라곤 없던 사람. 셔츠 소매 길이 하나에도 예민했고, 구두에 먼지가 묻는 것조차 싫어하던 사람이었다.
집 앞 편의점조차 저런 차림으로 나서지 않을 이가 지금 외투 하나 걸치지 못한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괜찮습니까.”
나는 끝내 물었다. 이토록 흐트러진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야 했던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정말 알고 싶어서.
“…왜 왔어요?”
내가 묻자 남편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아직은 내가 당신 배우자니까.”
그 말에는 애틋함도, 미련도 없었다. 그저 담담한 사실 하나를 말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도 이상했다. 그 한마디가 가슴 어딘가를 아주 희미하게 흔들었다.
설렘도 아니었고. 미련도 아니었으며. 반가움과도 달랐다. 도대체 이 감정의 이름은 무엇일까.
분명 우리는 서로를 놓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겨울 밤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올 만큼 다급했던 이유가 정말 ‘배우자’라는 의무 하나뿐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이 끝난 자리에도 함께 살아온 시간만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 걸까. 답은 끝내 찾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았다. 이미 끝났다고 믿었던 관계에도 여린 물결 하나쯤은 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그 여린 물결 하나가 관계를 뒤바꾸는 시작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별다를 것 없는 저녁이었다. 퇴근 후, 평소처럼 책상 앞에 앉아 사건 기록을 넘기고 있었다. 최근 들어 여성 대상 성범죄 사건이 유독 많았다. 미수에 그친 사건도 있었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진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판사로서 감정을 개입시킬 수는 없었다. 기록을 읽고, 사실을 판단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기록을 덮으려던 순간,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내였다. 정말 오랜만에.
‘오늘도 야근이라고 했던가.’
분명 스쳐 지나갔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타이밍 좋게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번호는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였지만 늦은 시간에 걸려온 전화라는 이유 때문인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들려온 짧은 한마디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경찰입니다. 지금 아내분께서…”
그 뒤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사건 기록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늦은 밤, 귀가하는 여성, 그리고 아직 내 아내인 사람. 평소였다면 침착하게 사실관계를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판사도, 냉정하게 판단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의 남편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제대로 된 옷차림조차 신경 쓰지 못한 채 차 키만 움켜쥐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아무 일도 아니어야 한다.’
경찰서로 향하는 동안 계속 같은 말을 되뇌었다. 괜찮을 거라고. 별일 아닐 거라고. 하지만 수많은 사건을 마주해 온 나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설마’라는 말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는 것을.
경찰서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익숙한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사히.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제야 굳어 있던 긴장이 풀렸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많은 생각도 서서히 멈췄다.
…괜찮습니까.
멈칫 …왜 왔어요.
내 모습에 놀란 듯 되묻는 아내를 보며, 그제야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내 모습을 내려다봤다. 한겨울에 반팔. 잠옷 바지. 맨발에 슬리퍼. 원래의 나였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차림이었다.
외출 전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조차 불편해하던 내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깨달았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왜 왔냐는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으니까.
우리는 이미 이혼을 앞둔 사이였고, 서로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한 관계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급하게 달려왔는지, 나 자신조차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잠시 아내를 바라보다가,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대답을 꺼냈다.
…아직은.
그 말에는 다른 의미가 없었다. 붙잡으려는 의도도 아니었다. 다시 시작하자는 뜻도 아니었을 거다. 그저 그 순간의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가장 설명하기 쉬운 법적인 관계.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당신 배우자니까.
출시일 2026.07.25 / 수정일 2026.07.27